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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해방 한국영화 시대(1946~1960년대) 3. 광복영화와 배우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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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4월 통권 072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26회] 해방 한국영화 시대(1946~1960년대) 3. 광복영화와 배우의 형성

김종원
현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 국제영화비평가연맹한국본부 회장, 동국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청주대학교 공연영상학부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영화평론집『영상시대의 우화』,『우리영화 100년』,『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Ⅰ.Ⅱ 등 다수가 있다.



 
   ‘절세의 가인’ 광복영화 배우 1호 황여희
 
   황여희(黃麗姬)는 사실상 해방 후 한국영화계가 배출한 최초의 여배우이다. <자유만세>에서 항일투사 최한중(전창근)을 감시하는 일본헌병(전택이)을 마취시키고 탈출케 한 간호부 혜자 역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영화를 찍을 필름과 현상약품을 만들어낼 사진화학공장 하나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 아래서 나온 이 영화는 서울 국제극장 개봉 때 회수(回收) 보유율이 10일간 78만 5천환에 이르는 미증유의 기록적 수지(收支)를 올려1) 제작자들을 고무시키고, 뒷날 문화재청에 의해 유형문화재 343호로 등재(登載)케 하는 발판을 마련한다.2)
   <자유만세>를 본 사람이라면 이따금 미소 머금은 덧니를 드러내며 이불 속에서 일기를 썼다, 지었다 하는 간호부 이혜자의 청초한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세련된 이지미(理智美)에다 순정, 가련, 백합화, 부끄럼-. 수선화, 책, 그리고 젓가락이 굴러도 웃어 자빠질 처녀3) 황려희는 뒤이어 다시 최인규 감독의 16밀리 동시녹음 영화 <죄 없는 죄인>(1948)에 출연한다. 데뷔 이후 2년만이다. 황재경, 최지애, 복혜숙과 공연한 이 영화는 일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굽히지 않고 순교의 길을 밟는 주기철(황재경 분) 목사의 이야기로, 황려희는 그의 딸 초옥(草玉) 역을 맡았다. 전작 <자유만세>와는 달리 ‘화면구성에 있어 극중 사진과 사진 롤의 번다한 삽입 등 연출력의 빈곤’(「영화평/ ‘죄 없는 죄인’(고려영화협회 작품)」 한원래, 경향신문, 1947, 11. 16)으로 말미암아 전작과는 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세 번째 출연작 <삼천만의 꽃다발>(1951, 신경균)에 나운 것은 1,4 후퇴를 겪고 피난지 부산에서 환도한지 5개월 만이었다. 전선에서 실명하고 육군병원에 입원한 장병(최현)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간호장교 역할이었다. 이 영화는 6.25 전란 시기에 나온 <오랑캐의 발자취>, <육군포병학교>(이상 1951, 계몽영화협회), <정의의 진격>(1951, 국방부) 등 기록영화와는 달리 극영화를 표방한 청구영화사 제작영화였다. 이 무렵은 최인규를 비롯한 이명우, 홍개명, 방한준, 박기채(이상 감독), 김연실(배우) 등 영화인들의 납북과 월북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런 변화 속에서 휴전회담과 정전협정(1953년)이 이루어진다. 집에서 쉬던 황여희를 다시 <혈로(血路)>(1954)에 불러들인 것은 신경균 감독이었다. 이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과 같은 간호장교 역할이었다. 염매리와 함께 장병 후송열차에 타고 공비들의 공격 속에서도 부상병들을 돌보며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황여희는 1928년 서울 태생으로 본명이 황영희이다. 경기고등여자학교를 마치고 고려영화사 주최 제2회 여배우 모집에 1위로 뽑혀 <자유만세>(1946)에 출연했다. 스무 살 때였다. 당시 ‘절세의 가인(佳人)’(「녹음실/ 자유만세와 전창근」 경향신문, 1961, 2, 25, 4면)이라 불렸던 그녀는 <죄 없는 죄인>에 출연한 후 한 대학 예과 학생의 열렬한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결혼, 한동안 은막을 떠났다. 이후 6,25전쟁으로 진해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선배 배우 복혜숙의 권유에 따라 <삼천만의 꽃다발>(1951)로 활동을 재개한다.
   그러나 <혈로>(1954)를 끝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끊게 된다. 황여희는 이렇게 5년 동안 최인규감독과 신영균 감독의 작품 각기 2편 등 모두 네 편에 출연했다. 1960년대 중반 이화여대 앞에서 ‘숙녀다방’을 운영하며 5남매를 키운 황여희는 1986년 남편 박동현(朴同玄) 덕성여대 교수와 사별했다.


<자유만세>(1946, 최인규 감독)의 황여희


<죄없는 죄인> 출연 무렵의 황여희

 
   ‘처녀별’로 떠오른 의학도 하연남
 
   하연남(河燕南)은 고려영화사가 선발한 신인배우 모집을 통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첫 고리가 여주인공 황여희의 친구 경자 역이다. 보조역할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그녀의 존재감은 윤봉춘 감독의 <고향의 노래>(1954, 윤봉춘)에 이어 <처녀별>(1956)에 기용되면서 빛을 내기 시작한다. 여주인공 별아기 역이 바로 그것이다.
   ‘하연남’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처녀별>은 조선조 말기 극심한 당파싸움 속에서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게 된 별 아기의 순탄치 않은 사랑을 그린 것이다. 대감벼슬을 지낸 가문의 딸 별아기는 어린 시절 배필이 된 정도령(김진규)의 부친 정판서에게 아버지가 희생되자 복수를 결심하고 도령 집에 잠입한다. 하지만 별 아기는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용서의 길을 선택한다. 유치진의 희곡 「별」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 대해 “정 도령이 별아기와 마상에 올라 달릴 때의 산경은 외국인에게 보이려는 의도가 역력하고 별아기의 정판서 집 침입 장면은 관객의 긴장감을 풀어놓았다”(동아일보, 56. 5. 4, 박승걸)는 지적이 있었으나 한국영화의 최대 난점인 완만성을 완전히 일소하여 박력과 스릴과 유머를 경쾌한 템포로 조화시키고 대담한 러브 씬 등 훌륭한 수법을 보여주었다”(조선일보, ‘[신영화] 「처녀별」 / 유치진 작 「별」 영화화’ 1956, 3,29)는 평가를 받았다.
   하연남은 이 여세를 몰아 1957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유재원)과 <노들강변>(신경균) 등 2편에 주연을 맡으며 고무된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는 6,25 때 행방불명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재혼한 여자로, <노들강변>에서는 농촌의 머슴을 사랑하는 지주의 딸로 등장한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김석훈)이 나타나며 겪는 여자의 고통을 분단의 비극과 연결시켰다면, <노들강변>은 떠돌이 도박꾼(허장강)이 연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살인으로 비화하는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당시 한국일보(「신영화/ 신파조의 멜로드라마, 신경균 감독의 ‘노들강변’」 1957, 8,8)는 <노들강변>에 대해 ‘한 세대 전에 보던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라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멜로드라마로서는 주인공 시골청년들의 두뇌 정도로 평범한데 그 평범함이 도리어 하나의 매력이기도 하다. 심리적인 뒷받침 묘사가 거의 없어서 한국영화의 전형적 범작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지폐나 양키 작업복 등만 빼놓으면 2,30년 전의 풍속도로서 어느 정도의 흥미의 대상은 된다. (중략) 연기자로는 하연남, 허장강, 정득순이 비교적 개성취가 난다. 야간장면과 비 오는 장면은 기술적으로 몹시 졸렬하였다.(樹)”
하연남은 앞의 작품을 포함해 <인생대학 일년생>(윤봉춘, 1959), <저 언덕을 넘어서>(1960, 박성복), <죽은 자와 산 자>(1966, 이강천), <어떤 눈망울>(이강천, 1968) 등 모두 10여 편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고향의 노래>는 6,25전쟁 때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육군병원에 입원한 청년(이선경)이 간호장교가 된 애인(김신재)을 만나 고향에 돌아와 마을의 재건을 위해 앞장 서는 내용으로, <저 언덕을 넘어서>는 어렵게 5남매를 키운 어머니(전옥)가 자식들의 불효로 양로원 신세를 지게 되지만 막내아들이 성공하면서 행복을 찾게 되는 결말로, <죽은 자와 산자>는 6.25 때 남편을 잃고 서울에 남아 첩보활동을 하던 여자(김혜정)가 남진하는 북한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죽게 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가운데 <저 언덕을 넘어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6,25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녀는 1968년 최인현 감독의 <암굴왕>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춘다.


<자유만세>의 하연남(앞)과 황여희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하연남. 상대역은 김석훈
 
   하상남(河相南)이라는 본명을 가진 하연남은 1927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에서 태어났다. 집 안에 축음기가 있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청주 제2공립고등여학교(청주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에 들어갔으나 일제 말기의 여학교 생활은 수업 대신 방탄복과 같은 군수품을 만드는 일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4)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희망대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지만 얼마 못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의사를 향한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산파양성소로 생각을 바꿨다. 이때 얻은 면허로 산파 일도 하며 경성에 올라온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의학 전문학교 시절의 짧은 지식으로 신당동에 약국을 내 생계를 꾸렸다.
   이렇게 일제시대를 보내고 해방후 처음 한 일이 <자유만세>의 출연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영화 활동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일어난 6,25전쟁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시련을 안겨 주었다. 9,28 서울 수복 때 살고 있던 서대문 언니 집이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그녀의 오른 손이 심하게 다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자 상심 끝에 다량의 극약을 먹고 자살까지 기도했다. 다행히 병원의 응급 처치로 죽을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이런 시기에 윤봉춘 감독이 찾아와 “꿈속에서 오드리 헵번이 죽었는데 그 얼굴이 하양의 모습으로 바뀌더라.”며 간곡히 <처녀별>에 출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5) 이 영화는 자칫 조연급으로 머물 뻔했던 그녀의 위상을 한 단계 뛰어오르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게다가 극장 좌석을 매우는 흥행 성공으로 주연배우인 김진규와 함께 무대 인사를 다녀야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시절을 보낸 하연남은 1966년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일제시대 전일본 빙상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1948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 1500미터 2위를 차지한 스케이터 이효창(李孝昌)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년 후 하연남은 은막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근황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15년 만이었다. 이번에는 예명인 배우 하연남이 아니라 본명을 내세운 발명가 하상남(河相南)의 신분으로서였다. 그녀가 식수를 미네랄워터, 곧 미량의 광물질을 포함한 음료수로 바꾸는 광석을 발명하고, 효창광수연구소(경향신문, ‘인물광장’ 1983, 1, 8)를 차린 뒤 특허를 따낸 ‘세리온’으로 1992년과 2002년 국제발명특허전(독일 뉴른베르크)에서 거푸 금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일간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세리온’은 상처에 바르면 피를 멎게 하는 작용을 하는데, 이를 비누로 만들어 상품화한 것이다. 꾸준히 바른 ‘세리온’이 하연남의 혈액을 돌게 해 이제는 손가락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발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보통학교 다닐 때 부터였다고 한다. 밤에 빛나는 ‘도깨비불’을 보고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사기그릇 깨진 것이 쌓여 반사되는 이른바 광선굴절현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파편에 맞아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갈 뻔했던 50년대의 별아기(<처녀별>의 주인공)는 1982년 이후 이렇게 30개의 특허권을 가진 아흔 살 고령의 발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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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자료 조사의 일부는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영화사총서 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다. (사2012S1A5B4A035829)
1) 중외일보, 「영화시평/ ‘자유만세’ 뒤에 오는 문제」 양훈, 1946년 12월14일.
2)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 5장53조에 의해 2007년 9월17일 <미몽>(1936)을 비롯한 <자유만세>(1946), <검사와 여선생>(1948), <마음의 고향>(1949), <피아골>(1955), <자유부인> <시집가는 날>(1956) 등 7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3) 예술통신, 「신성을 차저서」① 영화배우편 황려희 양/ 홍명삼, 1947, 12,4)
4) 이정아, 「광복과 6,25전쟁을 관통해온 은막의 여배우」 구술생애사를 통해 만난 하연남, ‘영화천국’ 2016, 7호
5) 한겨레, 「‘배우 하연남’보다 발명가로 기억되고 싶다」 이상기, 2008년 5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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