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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여허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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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1월 통권 033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24회] 여허의 마지막 날

이훈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 청조의 만주지역에 대한 시각과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청대 건륭기 만주족의 根本之地 만들기」(논문), 『만주족의 청제국』(공역)이 있다.


 
 
여허 東城內城 성터. 지면으로부터 5m 정도 솟아 있다.
 

   2013년 여름 필자는 중국사회과학원의 류샤오멍(劉小萌) 교수와 함께 중국 吉林省 四平市 葉赫鎮 교외에 있는 해서여진 여허의 성터를 답사했다. 여허의 마지막 버일러 긴타이시가 거주했던 東城과 역시 마지막 버일러 부양구가 거주했던 西城은 여허을 사이에 두고 각각 동남쪽과 북쪽에 2-3km 남짓 떨어져 마주 보고 있었다. 동성의 약간 남쪽으로는 여허의 또 다른 성이었던 샹갼 워허 (šanggiyan wehe, 현재명칭: 商監府城, 珊延沃赫城, 白石山城)의 성터가 있었다. 여허의 동성은 1573년에, 서성은 그보다 좀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후 여허가 멸망하는 1619년까지 대략 50년 정도 존속했다. 두 성이 존속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 기간의 후반기에 여허는 해서여진의 최강자였고 당시 두 성은 드넓은 만주지역의 중심이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명의 변경 도시인 開原으로 교역을 하러 갈 때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고 이곳에서 숙박해야 했다. 당시 이곳은 주위에 상당히 드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농경이 가능했고, 상업의 중개지로서 인구가 북적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져서 과거의 영화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지면으로부터 5m 정도 솟은 평평한 대지 위에 축조되었던 동성의 내성은 지금으로부터 393년 전 여허의 멸망과 함께 불타고 붕괴하여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긴타이시는 저 곳 동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한 후 끈으로 목 졸려 교살당했다. 류샤오멍 선생은 성터에 올라 긴타이시를 세 번이나 목놓아 長天에 닿을 듯이 외쳐 불렀다. 招魂이었다. 죽은지 사백년 세월이 흐른 지금 백골이 진토 되어 넋도 없을 긴타이시는 대답이 없건만, 류샤오멍 선생의 초혼은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역사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여허가 멸망한 직후 여허 인구의 대다수는 남쪽으로 200km 남짓 떨어진 건주여진의 수도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당하여 팔기에 편입되었고, 여허의 수도인 東城西城 일대는 사람이 사라진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된 지역은 여허만이 아니었다. 그전인 1601년 하다를 멸망시킨 후에는 하다의 인민을 모두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하다는 성채의 200-300리 내에 인적이 끊겼다고 묘사될 지경으로 폐허가 되었다. 1607년 호이파를 정복한 때도, 1613년 울라를 정복한 때도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모든 부민을 데려 왔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후금의 일통된 여진에 대한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청나라 역사나 만주지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청나라의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입관한 후 만주지역이 텅 비어버린 무주공산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지역 곳곳의 인구를 현재 요녕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댓가로 입관하기 수십년 전부터 요녕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필자가 본 여허의 폐허를 수백년 전 조선의 소현세자도 보았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중에 여허 지역으로 수렵을 하러 가는 청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이곳에 왔었다. 여허가 멸망한지 23년이 지난 16423월의 일이었다. 소현세자는 여허 고성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후에 사냥을 가다가 밤이 깊은 뒤에 넓은 들 가운데 와서 멈추니 북쪽에 폐허가 된 성이 동서로 두곳이 있다. 동쪽 성은 긴타이시(金他實)가 살고 서쪽 성은 부양구(白羊高)가 살던 곳인데, 전에 한이 이 두 추장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그 부락을 노획하고 그 땅이 비어있다. 두 성의 거리는 몇리쯤 되는데 동쪽의 성은 벽돌로 쌓았고 서쪽의 성은 나무로 된 성이다. 지금은 폐기되어 사는 사람이 없고 앞 들의 토지는 매우 비옥한데 쑥이 하늘에 접하고 성 밖에는 사람들의 옛 집터가 많다.” (심양일기, 숭덕 728)
 
   아래에서는 만주실록(manju i yargiyan kooli)의 기록을 참고하여 여허가 멸망하는 날 사진 속의 저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그릴 것이다.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청 황실이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황실 조상들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의 기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없이 사실을 전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상세히 이 날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619년 음력 819일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군대는 수도인 허투알라를 출발하여 해서여진의 마지막 남은 나라인 여허를 공격하는 장도에 올랐다. 동아시아 역사의 향배를 바꾸어 놓은 사르후 전투가 발발하고 끝난지 불과 5개월 정도 후였다. 누르하치는 여허의 東城西城을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둘로 분산했다. 여허의 西城을 공격하는 부대는 큰아들인 첫째 버일러 다이샨, 둘째 버일러 아민, 셋째 버일러 망굴타이, 넷째 버일러 홍타이지에게 지휘를 일임했고, 그 자신은 다른 하나의 부대를 이끌고 동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여허 공격에 동원된 후금의 병력 수는 만주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누르하치 예하의 버일러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과 군사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四大버일러(duin amba beile)라고 불리던 아들과 조카를 모두 동원한 것을 보면, 후금이 이 공격에 全力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허를 제외한 해서여진 모두는 이미 후금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여허는 후금의 공격 앞에서 다른 해서여진 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허는 지난 수십년간 해서여진의 핵심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명은 소규모나마 여허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명은 수개월 전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했고, 국가 내외적으로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며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대국이었다. 명은 사르후 전투가 끝난 후 여허의 몰락을 방어하기 위해 遊擊官 馬時楠周大岐을 총포병 1천명과 함께 파견하여 여허 동성과 서성에 분산 주둔시키고 있었다. 후금의 여허 공격은 단순히 여허를 공격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수개월 전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이 맞서야 했던 적이 명과 조선과 여허의 연합군이었듯이, 이 여허 공격은 여허와 명의 연합군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수개월 전 사르후 전투 당시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후금은 승전의 기세를 타고 있었고 명의 지원군은 보잘 것 없었다.
 
   후금군은 밤을 새워가며여허로 급속히 행군했다. 여허에게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후금군이 여허의 두 성 앞에 도착한 것은 음력 822일 새벽이었다. 200km의 거리를 단 3일 정도에 주파한 것이다. 후금군이 도착하기 전에 西城의 버일러인 부양구와 부르항구 형제는 정찰병으로부터 후금군이 공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방어 준비에 돌입했다. 성과 가까운 마을의 사람들은 성으로 들어갔고, 먼 곳의 마을의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피했다. 부양구와 부르항구는 22일 새벽에 병사들을 이끌고 성의 西門 밖으로 나갔다. 이들은 서문 밖에 있는 구릉 위에 포진하고 막 도착한 후금군 앞에서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후금군의 규모와 기세에 압도되어 다시 성 안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시작했다. 다이샨 이하 후금군은 서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에 진입했다.
 
   다이샨 등의 부대가 서성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누르하치가 이끄는 부대는 동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동성은 外城內城 이중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누르하치의 부대는 일단 외성을 파괴한 후, 내성 앞에 포진했다. 후금군은 사다리와 방패차를 내성 앞에 배치한 후에 긴타이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항복 요구에 대한 긴타이시의 거부는 단호했다. “우리는 漢人이 아니다. 사나이다. 너희에게 항복하느니 싸우다 죽겠다”. 후금군은 즉각 공격에 돌입하여 빗발치는 화살을 방패차로 방어하며 사다리를 내성에 붙이고 공성전을 벌였다. 여허군은 활을 쏘고, 불과 돌을 던지고, 통나무를 굴려서 방어했다. 그러나 결국 내성은 함락되었다. 내성의 여허군은 항복했고, 긴타이시는 처자식을 이끌고 내성의 가운데 있는 누각에 올라가 희망없는 최후의 농성에 돌입했다.
 
   항복할 것을 외치는 후금군에게 긴타이시는 후금의 다른 자는 믿을 수 없으니 자신의 외조카인 홍타이지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외조카인 홍타이지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긴타이시와 홍타이지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지만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더욱이 후금과 여허의 혼인동맹은 오래 전에 깨졌고 서로를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대결해 온 것도 오래되었다. 홍타이지가 긴타이시의 외조카라고 해도 긴타이시를 도와 여허의 멸망을 막거나 긴타이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긴타이시는 혈연에나마 기대기 위해 홍타이지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것 외에 쓸 수 있는 다른 카드가 아무 것도 없었다.
 
   누르하치는 긴타이시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서성을 공격 중인 홍타이지를 불러 왔다. 그리고 홍타이지에게 지침을 하달했다. “네 외삼촌이 네가 오면 누각에서 내려오겠다고 말하니 네가 가라. 그가 내려오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내려오지 않으면 누각을 잘라서 넘어뜨려라”. 지침을 하달받은 홍타이지가 긴타이시에게 갔으나 정작 긴타이시는 일면식도 없었던 외조카 홍타이지를 알아 볼 수도 없었다. 홍타이지라며 찾아온 자가 자신의 조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긴타이시의 말을 듣고 홍타이지와 함께 간 후금의 대신 피옹돈 자르구치와 다르한 어푸는 홍타이지 본인이 맞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는가? 보통 사람이 이렇게 빛나고 힘있게 생겼겠는가?” 피옹돈 등이 강변했지만 긴타이시는 또다시 홍타이지가 자신에 대한 안전 보장을 누르하치로부터 위임 받아오지 못한 것 같다며 누각에서 죽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홍타이지는 긴타이시에게 누각에서 내려 와서 투항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긴타이시는 홍타이지의 설득에 따르지 않고 누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만주실록은 이 부분에서 가필과 왜곡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빛나고 힘있게 생겼다며 홍타이지를 찬양하는 말과 홍타이지가 긴타이시를 설득하는 언설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많은 지면의 할애는 만주실록이 누르하치의 위업에 대한 찬양가임에 못지않게 홍타이지에 대한 찬미가임을 보여준다. 특정한 개인에 대한 찬미가가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농성 중에 보이는 긴타이시의 태도에 대한 묘사 역시 기록의 사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만주실록에서 긴타이시는 삶을 보장받기 위해 계속해서 얄팍한 계책을 도모하는 비겁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긴타이시의 태도에 대한 부차적인 서술을 제거하고 핵심만을 보면 그는 시종일관 누각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도 만주실록의 기록은 그가 누르하치로부터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막다른 상황에 몰려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이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긴타이시가 희망없는 상황에 처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홍타이지의 설득이 무위로 돌아간 후 긴타이시는 자신의 대신인 아르타시를 누르하치에게 보내어 안전 보장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누르하치는 아르타시에게 긴타이시에 대한 안전 보장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아르타시가 과거에 주군을 사주하여 명나라와 함께 여허로 하여금 후금을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질책한 후, 긴타이시를 데리고 오라고 아르타시를 돌려보냈다. 되돌아온 아르타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긴타이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홍타이지에 이어 아르타시도 긴타이시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긴타이시를 설득하기 위해 보내진 자는 그의 아들 덜거르였다. 덜거르는 동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부상을 입고 후금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덜거르는 누각 아래에서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우리는 싸워서 패했고 성을 빼앗겼습니다. 지금 누각 위에 있어 어찌하겠습니까? 내려오시지요. 죽이면 죽고 살리면 삽시다”. 아들의 설득에도 긴타이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긴타이시의 부인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누각에서 달려서 내려왔다.
 
   긴타이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후금군은 도끼로 누각을 찍어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타이시는 누각에 불을 질렀다.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한 적에 맞서다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최후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불타는 누각에서 긴타이시가 죽었으리라 판단하고 후금군이 뒤로 물러난 후에 긴타이시는 불에 그을린 상태로 불타는 누각에서 빠져나왔다. 누르하치는 즉시 긴타이시를 잡아서 줄로 목을 매어 교살해버렸다. 여허의 동성이 완전히 멸망한 순간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긴타이시는 죽으면서 건주여진을 저주했다고 한다. 그 저주의 내용은 훗날 여허의 여자 한 명이 건주여진에게 복수를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허의 후예 여성이 바로 먼 훗날 청나라의 쇠퇴를 가속시킨 西太后라는 것이 저주의 결말이다. 긴타이시의 저주와 그에 얽힌 전설이 비록 서태후가 여허의 후예인 사실에 기대어 빚어낸 호사가들의 가쉽거리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가 여허와 건주여진의 치열한 상쟁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고, 거기에 여허인의 원한이 녹아 스며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동성이 멸망한 후 서성의 버일러인 부양구와 부르항구는 후금에 투항했다. 부양구와 부르항구 형제는 누르하치의 큰아들이자 첫째 버일러인 다이샨과 처남 매부 사이였다. 즉 형인 부양구는 다이샨의 손위 처남이고 동생인 부르항구는 다이샨의 손아래 처남이었다. 여허 동성의 긴타이시가 홍타이지와 외숙질 사이였던 것처럼 여허 서성은 다이샨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형제와의 투항 교섭은 다이샨이 담당했다. 부양구와 부르항구는 다이샨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여허 성과 두 형제의 버일러 지위가 이전과 다름없이 유지되도록 보장하고 후금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다이샨은 그 조건을 거부하고 두 형제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만을 제시했다. 결국 부양구 형제는 후금에 투항했다. 그러나 투항한 후에 두 형제의 태도가 다이샨을 자극했다. 누르하치를 만나러 가라는 다이샨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부양구는 가기를 거부했다. 결국 다이샨은 부양구를 말에 태워 말고삐를 잡아 끌면서 부양구를 누르하치에게 데려 갔다. 그러나 부양구는 누르하치에게 투항한 자가 정복자 수장에게 보이는 무릎꿇고 엎드려 절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다리 하나만을 꿇었다가 일어서 버렸다. 또한 부양구는 누르하치가 하사한 소주잔도 비우지 않고 입만 대었다가 떼어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완전한 복종을 거부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살려준 은혜를 저버렸다며 밧줄로 부양구의 목을 졸라서 죽이게 했다. 그러나 동생인 부르항구는 인척 사이인 큰아들 다이샨의 체면을 생각하겠다며 살려주었다. 여허 동성에 이어 서성도 완전히 멸망했고, 동성과 서성의 수장인 긴타이시와 부양구도 피살되었다.
 
   여허의 두 성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군사 1천명도 모두 피살되었다. 이후 여허국의 여러 성들이 계속해서 항복했다. 만주실록에서는 투항한 여허 백성에 대한 처리 과정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투항한 여허의 백성들을 전혀 동요시키지 않고 父子· 兄弟· 夫婦· 친척을 갈라놓지 않았다. 모든 물건을 침범하지 않고 전부 옮겨 가져가게 했고, 살 집· 경작할 밭· 먹을 곡식· 器具 모든 물건을 전부 주었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일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후금은 여허의 소규모 가족을 갈라놓지는 않았지만 씨족과 촌락 단위는 완전히 해체하여 팔기의 여러 니루에 분산시켜 배치했다. 여허인을 대규모 집단으로 존속시킴으로써 발생할 반란의 가능성을 철저히 제거한 것이다. 후금의 여진 통일의 마지막 단계는 여허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만주실록은 여허의 멸망을 서술한 부분의 마지막 단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허국이 완전히 멸망했다. 그 해 후금국의 태조 누르하치 한은 동해로부터 서쪽으로 대명국의 요동의 변경에 이르기까지, 북쪽 몽고국의 코르친이 살던 끝의 지역 눈 강에서 남쪽으로 조선국의 변경 가까이까지, 하나의 만주 말 쓰는 나라를 모두 정벌하여 항복시켜 통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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