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머글 출신인 저와 제 두 동료들에게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특강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베풀어 주신 여러 마법사 선생님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제 강의를 듣기 위해 오늘 그리핀도르의 큰 강의실을 꽉 메워주신 많은 학생 여러분께도 역시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머글 세계에서 문학에 대한 강의와 글을 쓰며 살고 있는 평론가 아쉬(H)라고 합니다. 이미 지난 번에 두 머글 평론가들이 강의를 했듯이, 이 특강의 주제는 지난 10여 년간 있었던 호그와트와 악의 세력 간의 생사를 건 전쟁에 대한 머글 세계 문학평론가의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호그와트에도 볼드모트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도깨비(집요정)에도 속하지 않은 머글의 관점에서 본 마법 세계에 대한 것이지요. 이것은 이 강의가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하는 종족으로서 머글인 제가 마법 세계를 이해하는 지극히 머글화된(인간적인) 해석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 설령 제 강의 중 여러분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오늘 저는 이 전쟁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하나의 테마로만 압축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거울 하나. 해리와 그의 가족
오늘 저의 강의는 하나의 테마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것은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 전쟁 서사에서 제 눈에 유난히도 인상적이었던 어떤 이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호그와트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오브제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특정한 어떤 마법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며, 이 전쟁에서 등장했던 가장 무서운 적들의 실체를 구성하는 이미지이고, 그래서 여러분의 선배 해리가 그 적들을 물리치는 데에 유일하게 쓸 수 있었던 방어술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심지어 그 이미지는 영생불사를 위해 볼드모트가 만든 한 호크룩스에도 나타납니다. 물론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제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처럼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평범한 머글 태생으로서 머글 세계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 관점을 취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강의의 편의를 위해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 거대한 마법 세계의 다양한 국면들에서 보았던 것은 바로 ‘거울(mirror)’ 이미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배 해리의 불굴의 모험의 시간과 여러분이 마법을 배우고 있는 이 호그와트 학교가 실은 다양한 거울들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거울 이미지에 관해서라면 저는 한 학기도 강의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가장 중요한 논점에만 집중하여 간단히 얘기해 볼까 합니다. 쉬운 예로 마침 이 그리핀도르 강의실 한 편에 조용히 놓여 있는 저 거울이 눈에 띄니, 저것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하죠.
여러분이 지금 쳐다보고 있듯이 당연히 저것은 의심할 나위없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은 호그와트의 한 구성물답게 제가 살고 있는 머글 세계의 거울과는 무언가 다른 거울이지요. 물론 이곳에서 공부하시는 여러분은 저 거울이 어떤 거울인지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 거울은 자신의 가장 간절한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지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그 자신의 모습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 같이 나타나지요. 이 말을 머글 세계의 비평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저 거울은 여러분의 ‘욕망(desire)’을 드러내는 거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 거울이 결국 자신에게 가장 결핍된 것, 더 정확히 말하면 결핍되었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뜻이지요. 욕망이란 결핍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요.
여러분의 선배인 해리가 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을 때 무엇이 나타났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엄마와 아빠가 곁에 다정히 서 있고 그 한가운데에 어린 해리의 모습이 서 있었지요. 이 거울의 속성으로 볼 때, 이 장면은 너무나 예상 가능한 것이고, 그러므로 명백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게 해리의 가장 간절한 것, 그러니까 그의 욕망이자 그의 결핍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해리의 욕망이 왜 하필 저 거울을 통해 확인되어야 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울에 비친 상(像 imago)은 이 모험-전쟁 서사가 추동되는 ‘실재’에 대한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거울의 상은 거울에 비추어진 그 자신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해리가 비춘 그리핀도르의 저 거울에는 해리 자신뿐만 아니라, 해리의 부모들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미지가 그것을 비춘 자신이라면, 이 거울 속의 이미지는 그것이 곧 해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리가 마주한 거울 속의 이미지가 해리라고 한다면, 엄마와 아빠와 해리가 함께 등장하는 이 이미지는 따라서 그 자체가 바깥의 해리와 분리되지 않는 동형일체라는 뜻입니다.
머글 세계의 이론적 관점에서 이걸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는 해리 자신이며, 욕망(결핍)이 이미지를 구성한다면 욕망 자체가 해리의 본질이라구요.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거울의 이미지에 해리의 엄마와 아빠가 투영되어 있고, 거울 속의 엄마와 아빠가 해리를 다사로운 ‘눈(eye)’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해리가 마주하고 있는 거울 속의 이미지는 그 자신의 현실의 결핍을 거꾸로 반영하는, 그러므로 부재하는 것을 현존하게 하는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이미지이지요. 그런데 이 이미지는 사실 해리의 부모가 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해리의 이미지는 해리의 부모와 분리되지 않으며, 해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해리의 욕망은 언제나 해리 자신을 응시하는 부모의 시선(욕망)과의 교차 내지는 공존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해리가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지금은 돌아가신 덤불도어 교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 거울의 진정한 의미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덤불도어 교장님은 대체로 이런 취지로 말씀하셨지요. “이 거울은 가장 간절한 것을 보여준단다. 그러나 이 거울에서 지식이나 진실을 얻을 수는 없어. 사람들은 이 거울에서 시간을 허비하거나 미치기도 하지. 바라건대 이 거울을 다시는 찾지 마라. 꿈에 사로잡혀 살다가 현실을 잃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덤불도어 교장님이 보시기에 이 거울이 반영하는 상은 참된 지식이나 진실, ‘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그는 이 거울이 반영하는 상을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훌륭하신 덤불도어 교장님의 바람과는 별개로, 해리가 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건 아니건 간에 그것은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울은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매개하는 오브제에 불과하니까요. 해리의 욕망은 이미 해리에게 내재해 있으며, 그것이 곧 해리의 정체성, 그의 ‘참다운 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덤불도어 교장님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시고 제게 많은 감동을 준 분이시지만, 이 대목에서 교장님이 반 밖에 알고 계시지 못한 것은 욕망-이미지는 ‘꿈’이지만, 그 ‘꿈’이야말로 주체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실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점은 해리의 욕망이 그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시선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해리의 욕망을 반영하는 해리의 이미지, 해리의 본질은 곧 해리의 부모가 해리에게 바라는, 정확히 말하면 해리의 부모가 그 자신에게 바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미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머글 학자는 이런 걸 ‘환상(fantasy)’의 메커니즘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환상은 호그와트에서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마법(the magic)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머글 학자는 덤불도어 교장님과는 달리 환상은 꿈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꿈인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현실’이라고도 말하죠. 엄마와 아빠가 나타나는 해리의 거울이 해리의 실제 현실이 아니지만, 실은 해리의 심리적 현실을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환상이 곧 욕망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구성함으로써 해리의 향후 실천을 추동시키는 근원적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울 둘. 엄마의 정령-꽃사슴
이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보기 위해서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이 전쟁 서사 중에서 해리의 서사를 지켜보다 보면 주요한 고비마다 해리에게 나타나 방향추 역할을 해주고, 끝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보호해 주는 신비한 사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시듯이 그건 바로 꽃사슴입니다.
해리가 부모를 죽인 원수이자 악의 세력인 볼드모트의 사물화 된 일곱 개 육체인 호크룩스를 파괴하려다가 미궁에 빠질 때 이 꽃사슴이 홀연히 나타납니다. 해리는 이 신비한 환영에 매혹되어 뒤를 좇아가다가 덤불도어의 호크룩스를 파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눈여겨 볼 점은 해리가 이 꽃사슴을 보자마자 거의 즉각적인 수준에서 이 꽃사슴이 엄마 릴리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 꽃사슴과 해리의 무의식이 하나의 수준에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물론 해리와 같이 마법 교육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일 것입니다. 정령의 존재란 호그와트에서는 마법 세계의 당연한 현실이고, 마법사였던 엄마 릴리의 정령이 아들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이후에 밝혀집니다. 그것은 이 마법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들 중 하나인 디멘터에 의해 해리가 목숨을 빼앗길 뻔한 순간이었지요. 그 위기의 순간 호수 저편에 다시 한 번 홀연히 나타난 꽃사슴은 해리를 죽이고 있는 디멘터를 쫒아내고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해리는 이 꽃사슴을 당연히 엄마 릴리의 정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실제 있었던 일을 다시 역추적 하는 과정에서 해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해리가 지금까지 엄마 릴리의 정령으로 알고 있었던 그 꽃사슴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지요. 호수 건너편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꽃사슴은, 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현장에 다시 도착하여 디멘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해리 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여러분의 선배가 겪었던 이 서사를 무례하게도 하나의 거울놀이로 해석하는 제 머글적 관점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리가 매혹을 느끼며 마주했던 그 사물은 분명히 해리에게는 엄마를 대리하는 정령이었습니다. 그는 그 정령을 좇아가기도 하고 그 정령의 힘에 의지해 가장 무서운 악의 존재를 물리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가 마주하고 있던 것은 엄마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은 해리의 모험을 스크린을 통해 머글 세계에 중계해 주는 호그와트 카메라의 시점(point view)과 관련하여서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줍니다. 이 장면은 해리의 모험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해리가 자기 자신을 화면 바깥에서, 그러니까 제3자적 관점으로 보는 카메라 시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험이 펼쳐지는 스크린의 내부, 카메라 프레임의 내부는 드라마 무대와 같아서 그 위에 서있는 주인공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로 ‘객관적 위치’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해리는 머글 세계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해리의 마법 세계에서조차 절대적으로 예외적이었던 그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내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머글 세계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주체의 현실에 환상의 바깥은 없다’ 라고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해리의 모험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사물인 이 사슴은 실은 그 자신이었지만, 해리는 그것을 엄마로 ‘오인’합니다. 그가 마주하고 그를 매혹하게 했던 이 사물이 실은 그 자신이었다면, 우리는 이 꽃사슴을 해리 자신의 이미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꽃사슴이 해리를 절대적으로 매혹시켰다면, 이것은 해리 자신이 그 자신의 이미지에 홀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꽃사슴이 사방을 배경으로 물러서게 만드는 아우라를 발산하면서, 어둠 속의 신비한 발광체로 등장한다는 사실보다 이 이미지에 대한 해리의 매혹을 더 분명히 설명해 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선, 꽃사슴이 사실은 해리 자신이었다면 그가 마주보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 즉 거울의 상이었다는 사실이지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해리는 기분이 몹시 나쁘겠지만, 이 오인된 자기 이미지에 대한 해리의 치명적인 매혹이야말로 머글의 비평적 용어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이미지가 이 모험에서 중요한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이미지는 비록 오인된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힘이 매우 센 사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오인된 이미지이지만 그것이 해리 자신의 욕망을 운동시키고 결정적인 실천력을 산출한다면, 이 이미지는 덤불도어 교장님의 말씀대로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이 꽃사슴이 ‘꿈’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꽃사슴은 ‘꿈’, 즉 환영이지요, 그런데 그 ‘꿈’ 자체가 실재(현실)의 핵심을 구성한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사실은 첫 번째로 지적한 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매혹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 꽃사슴으로 나타난 이 이미지는-결과적으로는 해리 자신이었던 자기 이미지-유독 해리 자신이 목숨을 걸만큼 절대적인 아우라를 걸친 채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가장 강력한 나르시시즘적 에너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유력한 해석 중 하나는, 이 나르시시즘적 에너지에는 훼손되지 않은 채 절대적인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는 순수한 타자, 즉 엄마(와 아빠)의 존재가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해리의 이미지는 해리에게 절대적인 결핍을 상징함으로써 그에게 심리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과 철저한 동형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성을 좀 더 분명히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제 전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이 불편하실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순수한 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해(Perfect Pure Blood Society!)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번 호그와트의 슬리데린 강의실에서 특강을 하셨던 제 동료 머글 초우(Cho) 선생님의 강의를 잠깐 상기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지난 번 강의에서 초우 선생님은 이 전쟁에서 제일 석연치 않은 지위에 있는 게 제가 속한 종족인 머글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 전쟁은 선을 대변하는 호그와트와 악을 대변하는 볼드모트로 선명하게 전선이 그어져 있지만, 사실 이 전쟁이 발생한 가장 중요한 갈등 요인은 마법사의 ‘피(blood)’가 흐르지 않는 머글과 그 머글의 피를 일부 섞어 받은 ‘혼혈·잡종’ 마법사들에 대한 볼드모트 진영의 종족주의적 혐오감, 순수혈통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종주의, 혈통주의, 순수한 백색신화는 해리의 절친이자 이 모험의 또 다른 주인공인 헤르미온느조차도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로서, 이 전쟁을 이념 전쟁 또는 세계관의 전쟁이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만큼 이 서사의 핵심 갈등 요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해리를 비롯한 호그와트의 마법사들이 볼드모트의 인종주의 또는 순수혈통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절대적인 타자로서 아예 존재론적 지위 자체가 부인되고 있는 머글의 존재 지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문제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호그와트의 무의식이자 그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해리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넌 네 부모를 쏙 빼닮았고, 특히 엄마의 눈을 그대로 닮았다. 그런데 그 엄마와 아빠는 최고의 마법사였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이 말이 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긴 전쟁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말이라는 점에서도 호그와트의 근원적 무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넌 네 부모를 쏙 빼닮았고, 특히 엄마의 눈을 그대로 닮았다. 그런데 그 엄마와 아빠는 최고의 마법사였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것은 해리를 보는 호그와트의 시선의 본질을 드러내며, 이것이야말로 어린 해리가 되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 그들 공동체의 이미지입니다. 호그와트는 해리의 눈에서 그의 부모를 보고, 해리는 그들이 그의 눈에서 보는 그의 부모를 자신의 눈에 다시 담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마법사 세계에서 최고의 마법사이지요. 물론 여기에서 제 해석에 이의를 다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엄마인 릴리포터는 머글과 피가 섞인 혼혈이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물론 매우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이 모험 서사에서 해리의 정체성이 표면적으로 ‘아주 다소’ 모호해지는 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릴리포터가 지닌 머글적 정체성(잡종·혼혈)이 호그와트 세계 내에서 최고의 마법사를 부모로 둔 해리의 ‘순수한’ 혈통적 지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비유하건대, 마치 저희 머글 세계에서 조상 대대로 귀족집안은 아니었으나, 부모대에 이르러 탄탄한 부르주아적 지위를 선취한 집안의 자식이 그 혈통적(계급적) 지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이런 점에서 헤르미온느의 처지는 단지 그 집안 대대의 혈통적 순수성이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혈통적 잡종성을 ‘세탁’할만한 지위를 그 부모들이 선취하지 못했으며, 이 ‘세탁’의 몫은 그 부모 세대가 아니라 헤르미온느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해리포터의 세대에서 볼 때 그 부모는 이미 전설적인 마법사이고, 해리는 그 혈통적 지위를 계승한 호그와트 세계의 적자로서 이 모험이 스크린에 등장할 때부터 선민적 지위를 지닌 구원자로 승인받은 위치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해리의 모험은 잡종·혼혈 마법사나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는 머글의 지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생득적인 선민적 지위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여기에서 그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최고의 마법사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혈통적’ 차원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리의 이미지는 이중구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해리는 그 자신의 절대적인 결핍을 상징하는, 따라서 절대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바라는) 엄마와 아빠를 그 자신의 이미지 속에 투사합니다. 그러나 실은 해리가 되기를 원하는 이미지는 그 엄마와 아빠가 해리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이미 속박되어 있으며, 그 엄마와 아빠의 이미지는 다시 호그와트 세계가 원하는 가장 훌륭한 마법사, 궁극적으로 호그와트 공동체를 대리하는 표상입니다. 다시 머글적인 차원에서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해리의 이미지란 상상적인(imaginary) 차원에서나(그가 원하는 이미지), 상징적인(symbolic) 차원에서나(그가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이미지, 결국 타인들이 그에게 바라는 이미지)나 모두 그 부모의 시선에 철저히 속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호그와트 세계의 무의식을 대리합니다. 그렇다면 덤불도어 교장님의 말씀대로 해리는 정말 그 자신이 옳은 것을 ‘선택’하는 독립적인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의 정체성이 독립적인 그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는데 말입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논점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마법사인 네 부모를 닮았다는 그 반복된 논점은, 결국 이 싸움이 여전히 순수 혈통주의의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헤게모니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해리와 호그와트는 볼드모트의 순혈주의와 대항했지만, 이것은 볼드모트의 도발에 대해 호그와트 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매우 수세적인 싸움이며, 실제로 마법사의 피를 받지 못한 머글의 지위나 혼혈·잡종의 존재론적 지위와 관련해서 이 전쟁은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머글 종족에 속한 제 관점에서 보자면, 이토록 가혹했던 전쟁은 그 희생에 상응하는 수준의 우주적 이념 변화나 종래 우주 질서의 혁신과는 무관한 전쟁이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도 문학과 철학은 필요하다
역시 가혹하게 들리시겠지만, 저희 머글 세계의 이론적 관점을 빌려 말하면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이념적 변혁에 무심한 전쟁, 또는 현존하는 세계관에 근본적으로 매스를 가하지 못하는 ‘물리적’ 전쟁은 언제나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한 정신의 현존 질서, 그러니까 동일한 정신의 ‘구조’ 속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상투적인 역사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볼드모트와 해리포터는 제가 알고 있는 한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구조, 그러니까 동일한 게임규칙을 지닌 장기판 위의 탁월한 말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순혈주의 세력인 볼드모트는 죽었고 여러분의 선배 해리는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였지만, 그들은 구조를 이루는 한 요소, 장기판의 한 칸을 채우고 있는 말들일 뿐 그들이 놓여 있던 칸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장기판의 게임규칙, 그어 놓은 금들의 형태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면, 볼드모트는 예전에 그랬듯이 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게 제가 살고 있는 머글 세계의 참혹한 역사 속에서 제가 배운 진실입니다.
여러분, 진정 전쟁의 종식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제2, 제3의 볼드모트와 대적할 마법만이 아니라, 이 우주적 차원의 계급 판도 자체를 변혁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 질서의 수립을 위해서도 열심히 공부하셔야 할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장기판 자체를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마도 정신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선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저 우주가 아니라, 바로 이 강의실 내부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문학과 철학은 이 호그와트 학교에 도입되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목일 것입니다. 머글 문학평론가인 제가 감히 이 자리에서 마법사 종족에게 특강을 하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된 것도, 아마 그러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드디어 이 호그와트에도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겠죠.
투쟁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강의실) 요충지이고, 힘의 전선이고, 빗장이고, 장애물이다.
- 머글 철학자 M.Foucault, 1978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