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제9회] 무당
확대 글자크게 축소 글자작게

2012년 02월 통권 010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9회] 무당

박유희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부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소설의 수사학을 연구하여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에 『동아일보』신춘문예 영화평론에 당선되면서 연구의 범위를 영화로 확장하여, 지금은 영화를 중심으로 서사 장르와 수사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는 『디지털 시대의 서사와 매체』, 『서사의 숲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다』 등이 있다.

 
   1.

   ‘붉은 무복에 빗갓을 쓰고, 한손에는 부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여인이, 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가 춤을 춘다.’ ‘무당하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실제로 무당이 굿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무당이라고 하면 이러한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대부분 영상매체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그 기원은 대부분 영화에 있다.

   한국영화는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무당을 재현해왔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구축하고 있는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무당이라는 키워드로 검색되는 영화는 70여 편에 이른다. 이외에도 목록에서 누락된 영화와 지엽적으로 무당이 나오는 영화까지 고려한다면 그 편수는 더 많을 것이다. 대중은 그러한 영화들을 보면서, 그리고 복식이나 소품 등에서부터 영화의 영향을 받은 여타 영상매체 속의 무당을 보면서, 실제 무당을 상상하고 무당에 대한 심상을 구축해왔다.

   원래 무당(巫堂)’은 길흉화복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을 남녀에 관계없이 통칭하는 말이다. 지방에 따라 여자 무당은 단골, 심방, 만신 등으로 칭하고 남자 무당은 박수, 화랭이, 낭중, 양중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명칭이 여러 가지인 만큼 그 형상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당하면 여성부터 떠올리고, 게다가 몸피가 두꺼운 사람보다는 날카로운 선을 지닌 여인을 환기하게 된 것도 영상매체를 통한 이미지 구축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무당 표상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의 뇌리에 무당의 이미지가 각인된 것도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60년대~1980년대를 중심으로 무당 표상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영화를 살펴보면서 무당 표상이 변천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맥락을 짚어보고자 한다

  


   2.

   무당 표상과 관련된 식민지 시대 영화로는 미신타파를 계몽하고 있는 <밝아가는 인생>(이규환, 1933)과 정비석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성황당>(방한준, 1939)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후 문화접변의 혼돈 속에 있었던 1950년대에는 오히려 무당 표상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고려장>(김기영, 1963), <>(신상옥, 1963), <김약국집 딸들>(유현목, 1963) 등 일련의 영화들이 제작된다

   1960
년대 전반기의 영화들에서 무당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재현된다. 그들은 근대화에 반()하는 걸림돌로 철폐되어야 할 구습의 상징이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영화는 박정희 정권의 농촌 근대화 정책을 충실히 서사화했던 <>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용이(신영균)는 강과 마을 농토를 가로막고 있는 산에 굴을 뚫어 농토에 물을 대려고 한다. 그러자 마을 무당 갑순 어미’(전옥)는 그러한 일은 산신령을 노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사업을 막는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지주인 송 의원(최삼)이 물과 농토를 독점하고자 갑순 어미를 매수한 것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로 군인들이 집권하면서 용이의 사업을 지원하여 결국 굴이 뚫리게 된다. 그래서 용이를 위시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지만 갑순 어미만이 딸을 잃고 불행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갑순 어미는 자식을 잃음으로써 가장 큰 벌을 받는 데 반해, 정작 음모를 사주한 송 의원은 사위가 될 용이의 관용으로 구원된다는 점이다. 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젊은이와 군인 계층, 그리고 지주까지 연대를 형성하는 가운데, 무당이 모든 죄를 떠안고 제물처럼 희생되는 셈이다. 이는 이 영화의 생산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당대의 리얼리티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무당(석금성)의 모습. 뒤쪽
    으로 서낭당에 빌고 있는 어머니(황정순)의 모습이 보인다.
 ◀ 1960년대 영화에서 무당역을 자주 맡았던 배우 전옥.
 
   이러한 무당 표상, 즉 근대화의 적이자 악이지만 결국 패배하여 사라져가는 인습으로 무당이 재현되는 것은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황정순)는 전통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온 인물로 무속을 믿는다. 그녀는 우연히 만난 무당(석금성)이 죽을 운명을 예언하자 액운을 피하기 위해 큰굿을 벌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사위(허장강)의 손에 살해됨으로써 굿의 헛됨이 입증된다. 이는 어머니와 무당이 공모했던 전근대적 가치의 패배와 몰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어머니와 함께 전근대적 가치 속에 함께 있었던 아버지 김약국(김동원)의 가부장적 의식은 기독교도이자 근대적 엘리트인 용빈(엄앵란) 커플과 손잡음으로써 전통의 자리로 격상된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가 원작과 달라지는 지점으로, 무속을 믿었던 어머니가 참혹하게 죽는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자, 이 영화의 결말이 <>의 결말과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전근대적 요소 중에서도 유난히 무속을 타파 대상으로 타자화했던 것은 1960년대 전반기에 무당을 재현했던 영화들의 특징이다. 심지어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작가주의적 색채가 가장 강한 김기영의 영화에서조차 그러한 특징이 드러난다. <고려장>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영화에서 이루어진 모든 반목과 악행에 대해 모든 것은 무당이 꾸몄어. 산 사람을 서로 원수지게 만든 것은 무당이야.”라는 폭로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주인공 구룡(김진규)이 마을에서 없애야 할 것이라며 무당이 숭배하는 고목을 쓰러뜨린다. 여기에서 무당은 전근대적비문명적 악()을 상징하며 계몽의 가치와 대척된다. “가르쳐주는 사람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구룡의 마지막 대사는 그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3.

   <
갯마을>(김수용, 1965)은 무당 표상 면에서 앞의 영화들과는 다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무당 역할도 <><고려장>에서 무당을 연기했던 배우 전옥이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무당은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한 어부들의 넋을 건져주며 유족들의 애통한 마음을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 효능은 망자의 가족들이 굿을 진정으로 믿고 그것을 통해 위로받음으로써 증명된다. <갯마을>은 인간과 자연의 유비관계를 보여주는 문예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자연 순응적인 태도와 생명력은 근대화의 속도가 주는 피로감을 위무했다. 이 영화가 비평뿐 아니라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며 이후 한국 예술영화의 경향을 주도했던 것은 이 영화가 지닌 태도의 대중적 효용을 입증한다. 여기에서 무당은 운명을 함의하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로 기능한다. 이와 같이 굿이 근대적 과학으로는 입증되기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일정한 사회적 효용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이어지고 있는 무속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무당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한다 해도 1960년대에는 무당이 주인공으로 전면화 되지는 않았다. 무당은 단역이 대부분이고 기껏해야 조역일 뿐이었다. <고려장> 정도가 텍스트에서 무당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예일 것이다. 영화에서 무당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이다. <무녀도>(최하원, 1972)는 그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현재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무당 이미지, 작두 타는 무당 표상을 보여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시에 주인공 배역을 놓고 최고 여배우였던 김지미와 윤정희가 다툴 정도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윤정희가 주인공 모화역을 맡는데, 김동리가 무녀도를 확장개작한 을화를 영화화할 때에는 김지미가 타이틀 롤을 맡는다. 미모의 여배우들이 무당 역할을 맡은 것은 1960년대와는 달라진 현상으로 무당에 성적인 이미지를 더하는 데 한 몫 한다. 한편 이 영화들은 예술영화로 인정받으며 우수영화 포상을 받는다. 그만큼 1970년대에는 무속이 영화에서 예술성을 구현할 수 있는 주요 제재로 떠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녀도>를 보면 그 예술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
무녀도>에서 모화는 지체 높은 집 관옥 같은 도령(신영일)을 사랑하다 임신한 채 버림을 받고 무당이 된 인물이다. 그녀는 연인을 잃은 자리에 몸주신을 받아들인다. 모화는 도령을 쏙 빼닮은 아들 욱이(신영일)를 낳지만, 그녀의 팔자 내림을 하지 않으려고 멀리 보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이 장성하여 돌아오자 그녀는 아들에게 온 정성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연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도령 역과 아들 역을 맡은 배우가 같다는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리고 모화와 욱이가 투숏으로 잡힐 때 모자지간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다 선명해진다. 모화는 욱이가 돌아오면서부터 몸주신과 불화를 빚으며 신기가 떨어지는데, 이는 그녀가 연인을 잃은 자리에 몸주신을 받아들인 것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사랑이 필요하여 무당이 된 것이고, 사랑이 성취되었다면 무당이 되지 않았을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모든 행동은 현실적인 사랑을 지향한다. 욱이마저 떠나자 스스로 굿을 청하여 예기소에 몸은 던지는 것은 마지막 사랑마저 잃은 여인의 선택을 보여준다.
 
   
   (
) <무녀도>에서 모화가 욱이의 등목을 쳐주는 장면. 모자(母子)로 보기에는 어머니가 너무 젊다.
   () <신궁>에서 장승포 큰무당 왕년이가 활을 겨누는 장면
          윤정희는 1970년대 영화에서 무당 역할을 자주 했던 배우 중 하나였다
          그녀의 미모는 그녀가 재현하는 무당을 에로틱하게 보이게 하는 데 한 몫 했다.
 
   이와 같이 모화는 사랑의 감정에 충실한 여인이자, 그로 인해 수난을 당하는 여성이자, 그래서 무당이 되는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 지고지순한 사랑, 여성의 수난, 그리고 그것을 자연의 섭리로 바라보며 순응하는 태도로서의 샤머니즘은 1970년대 예술을 표방하는 영화들이 지닌 것이었다.

   원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기독교와 무속의 대립이 부각되지 않는 것도 1970년대 예술영화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영화에서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함께 예술성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였다. 당시 텔레비전의 보급, 검열의 강화 등으로 위기에 몰린 한국영화는 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대중성이 약한 예술영화는 더욱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근대화의 상징성을 지니는 기독교와 민족전통의 이름으로 소환된 전근대적 운명론은 서로 모순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예술성의 큰 줄기를 담당한다.
 
 
   4.

   1980
년대를 전후로 하여 무당 표상에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을화>(변장호, 1979), <신궁>(임권택, 1979), <피막>(이두용, 1980), <불의 딸>(임권택, 1983)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무속에 대해 합리적 해석을 시도하는 한편, 무당을 억압받는 피지배자 내지 서구문화에 의해 밀려난 전통 민중문화의 상징으로 재현한다.

   <
을화>, <신궁>, <피막>은 모두 복수담이다. <을화>에서는 무당들이 영역을 두고 현실적인 이권 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 와중에 싹트는 원한과 복수가 영화의 줄거리를 구성한다. <무녀도>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대립은 주요한 갈등이 아니다. 무속이 지닌 초현실적 측면은 해명할 수는 없으나마 부분적으로 인정하되, 무당이 지닌 영매로서의 이미지를 약화시키고 현실에 적극적인 인간형으로 그린다. 그래서 <무녀도>의 모화가 지닌 운명순응적인 면모는 <을화>에서는 많이 사라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신궁><피막>에 가면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을화>에서의 복수가 무당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결과적으로는 피학적인 양상을 띠었다면, <신궁><피막>에서는 복수의 방향이 바뀐다. 즉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권력자가 복수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우선 <신궁>에서는 장성포를 주름잡던 당골네 왕년이(윤정희)가 남편 옥수(김희라)를 잃고 굿 손을 놓은 시점에서 시작한다. 동네 유지들이 몰려와 왕년이에게 굿을 청하지만 그녀는 한사코 마다한다. 그리고 영화는 플래시백 되어 옥수가 선주 최판수의 흉계로 죽은 사연이 제시된다. 영화가 다시 현재로 돌아왔을 때 왕년이는 큰굿을 벌인다. 그리고 굿판에서 최판수에게 살풀이를 해주겠다고 자청하여 그의 머리에 바가지를 씌우고는 화살을 쏘아 박는다. 영화는 피 흘리며 쓰러지는 최판수를 보며 왕년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난다. 그야말로 빼앗긴 자, 억눌린 자의 통쾌한 복수담이라고 할 만하다.

   <
피막>은 양반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피막지기(남궁원)의 딸(유지인)이 복수를 하는 이야기로 무당의 복수담이라는 차원에서 <신궁>과 동궤에 놓인다. 그런데 <피막><신궁>보다 합리적인 추리 쪽으로 기울어지며 장르 면에서 스릴러에 가까워진다. 이 영화에서 옥화(유지인)는 아비의 복수를 위해 무당으로 가장하여 진사 댁에 들어간다. 그리고 양반의 체면을 위해 아비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진사 집안의 어른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이러한 범행 과정은 사후에 동경유학생인 진사 댁 손자에 의해 밝혀진다. 그러나 옥화가 진사 댁 도령의 병을 고쳐내는 것, 결국 옥화에게 신이 내리는 것, 그리고 우연적 요소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살인 과정 등은 영화에서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무속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도, 합리적 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초현실적인 것으로 남겨두어 답을 유보하는 태도는 1980년대 이후 무당 재현에서 일반화되는 특징이다.

   <
불의 딸>은 무속에 대해 민중문화, 전통문화의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심오한 의미를 내장한 것으로 신비화하며 격상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대립이 부각된다는 점이다. 이는 <무녀도><을화>에서 원작과는 상관없이 그 대립이 주된 갈등이 되지 못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또한 <불의 딸>에서는 그 대립에서 기독교를 외세(外勢)로 의미화하면서 샤머니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는 민중의 이름으로 전근대 민속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가 이루어졌던 198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하명중, 198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 1987), 그리고 <태백산맥>(임권택, 1994)에까지 이어지며 변주된다.

   
       (
) <을화>에서 무당 을화(김지미)가 굿을 하는 모습
       (
) <불의 딸>에서 불에 홀리는 무당인 해동 어미(방희)의 모습.
               방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무당 역을 자주 맡은 배우 중 하나였다
               그녀가 무당을 재현할 때 에로틱한 분위기는 한층 강화되었다
       (
) <피막>에서 옥화(유지인)가 굿을 주관하는 장면.
 
   <태백산맥>1994년에 개봉했지만, 그 기획은 1980년대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198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호남 지방 씻김굿을 행하는 세습무의 형상을 주요한 무당 표상으로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이름에서부터 처연한 백색을 연상시키는 무당 소화(오정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복 위에 백색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는 종이 고깔을 쓰고 손에는 지전을 든 채 이념 대립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천도하는 굿을 주관한다. 이는 제의를 통해 반목과 분단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으로 굿이 지닌 초월적 승화로서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를 통해 붉은 색으로 각인되었던 무당의 이미지는 표백되며 순결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당이 타자화된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탈피한 것은 아니다. 소화는 여전히 남성에 의해 갈망되고 동경 받는 대상으로서의 표상과 목소리를 지닐 뿐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
) <태백산맥>에서 소화(오정해)가 씻김굿을 하는 장면
   (
) <영매>에서 진도 무녀 채정례가 역시 무녀였던 언니 채둔굴의 씻김굿을 하는 모습.
 
   우리가 실제 무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큐멘터리 <영매>(박기복, 2002)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무속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려는 태도로 전국의 무당을 취재하여 보여준다. 한국 무당에 공시적으로 접근하여 여러 표상을 유형 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무당 표상의 정리본이라고 할 만하다. 21세기 들어 개봉된 이 차분한 다큐멘터리가 입소문으로 관객을 불러 모으며 흥행했던 것은 무속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과 더불어 샤머니즘의 현실적 효용이 여전함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진자료 출처: http://movie.naver.com

페이스북 트위터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