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2월 통권 010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차연은 디페랑스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가?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을 “개념들을 형성하고 발명하며 만들어내는 기술”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념들을 창조하는” 학문으로 규정한 바 있다. “철학자는 개념의 친구이며 개념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개념들을 형성하거나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개념들은 반드시 형태들, 고안물들 또는 생산물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념들을 창조하는(créer) 분과학문이다. ... 항상 새로운 개념들을 창출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대상이다.”[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 8-10. 강조는 들뢰즈-가타리.]
실제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개념들을 통해 사고하고 작업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기존에 널리 쓰이던 개념을 가져와서 그것을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새롭게 개조하거나 변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하기도 한다. 가령 스피노자나 칸트의 경우가 그렇다. 특히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철학자들은 매우 드문 편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유독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낸 철학자다. 가령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e), 갈등적 구조(stricture), 탈운(脫運)(destinerrance, 이것은 ‘목적지’, ‘운명’을 의미하는 destin과 ‘일탈’, ‘벗어남’, ‘방황’을 의미하는 errance의 합성어다), 유령론(hantologie)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 중에서 디페랑스(différance)라는 신조어는 데리다의 개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는 디페랑스의 어근이 되는 différer라는 불어 동사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의 ‘차’라는 음절과 지연의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다. 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한편 데리다 영역본에서는 différance라는 불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꽤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과연 이것이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번역어의 문제는 디페랑스 개념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데리다 철학에 대한 좀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이러한 문제제기는 필요하다.
차연이라는 번역어의 세 가지 문제점
1) e와 a의 차이의 의미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것은 영어의 difference와 마찬가지로 ‘차이’를 의미한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으며(두 단어는 불어에서 모두 ‘디페랑스’라고 발음된다), 따라서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는 서양의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페랑스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차이’를 뜻하는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음성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지닌 모순의 근원에는 문자기록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발견함으로써 언어학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으로 구성했다. 왜냐하면 기호와 사물 사이의 관계 또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기호 체계가 사물들의 세계, 또는 사물들에 대한 재현으로서 의미의 세계와 직접적인 (곧 대응적ㆍ모사적인) 관계없는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문자기록의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곧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는 음성이나 음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대화를 진리의 본질적인 장소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데리다는 플라톤과 루소, 후설 등의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 음성의 우위, 로고스의 우위, 생생한 현재(또는 현존)의 우위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제는 문자기록이 로고스가 성립하기 위한 근거라는 점을 억압하거나 부인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 원리를 밝혀냄으로써 이러한 음성중심주의와 로고스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도구로 간주하고 음성의 연결을 언어에서 유일하게 자연적인 연결이라고 주장함으로써(소쉬르에게 기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기록된 글자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전히 음성중심주의를 되풀이하고 있다.
“문자기록 자체는 [언어의-인용자] 내적 논리에 외재적이긴 하지만, 언어가 그것을 통해 계속 형상화되는 기법[곧 문자기록]을 추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기법의 유용성, 한계, 위험성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De la grammatologie, p. 44에서 재인용.
“[언어에서] 자연적인 연결, 유일하게 진정한 연결은 음성의 연결이다.” 같은 책, p. 46.
“시각 이미지[곧 문자]는 결국 음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게 되고 ... [이에 따라] 자연적 관계는 전복된다.” 같은 책, p. 47.
따라서 음성적인 식별 불가능성과 문자기록을 통한 식별의 문제는 특히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다.
2) 기원의 탈구축
또한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마치 디페랑스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디페랑스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사실 데리다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발표한 “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디페랑스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이다)에서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에 수록).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는 소쉬르를 따라 (기호)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디페랑스는 음성상의 차이의 조건이 문자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둘째,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디페랑스’에 관해 말함으로써 디페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différence와 디페랑스의 차이, 곧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해, 디페랑스는 모든 차이는 ‘지연’의 작용으로서 ‘시간내기’(temporiser)와, ‘차이’의 작용으로서 ‘공간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내기’는 쉽게 말하면 가령 전기밥솥의 타이머의 작용 같은 것을 의미한다. 타이머는 밤 12시에 이루어질 작용을 아침 6시까지 지연하는 작용을 한다. 또한 ‘공간내기’는 컴퓨터의 스페이스바의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알다시피 스페이스바는 간격을 띄우는 기능을 하는데, 데리다가 볼 때 로고스, 곧 의미의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들 사이의 결합,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배치 및 기술적 간격 두기가 필수적이다.)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기 자신과의 차이, 이중화, 다수화를 통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한다.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의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기록 안에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디페랑스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조합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리다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기원의 탈구축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항상 기원의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이다.(데리다가 보기에는 공시적인 차이의 체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한계다. 이 경우 궁극적으로 기원의 동일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로고스중심주의를 똑같이 되풀이하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데리다 비판의 한 가지 논점이 이것이다.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 in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67.)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디페랑스의 의미 효과를 너무 좁게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어로 보기 어렵다.
3) 낯설게 하기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과 학문,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
곧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데리다 자신이 「디페랑스」에서 직접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이[이처럼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의 기록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기록/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écrit)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J. Derrida, Marges-de la philosophie, 앞의 책, p. 1)
데리다의 이러한 지적은 「디페랑스」라는 강연이 이루어진 1968년보다 한 해 전에 출간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나 『목소리와 현상』 같은 저작에서 디페랑스에 대한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주의 없이, 마치 그것이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단어인 것처럼 태연하게 사용되었던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리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면서 의도했던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연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대안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다.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교수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디페랑스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필자 자신은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공동으로 지은 『에코그라피』를 번역하면서 ‘차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다.[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대하여』,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수정 재판, 2012 예정)] 이러한 번역은 데리다의 디페랑스라는 개념이 지닌 기록학적인 측면을 존중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또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한 바 있다.(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이러한 대안적인 번역어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은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차이(差移)’라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것은 디페랑스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이’라는 역어와 달리 디페랑스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단어 또는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디페랑스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차이(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디페랑스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다.
물론 ‘차이(差移)’라는 역어 역시 디페랑스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차이(差移)’는 기존에 제시된 번역어들 중에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충실한 번역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