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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비명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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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4월 통권 072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61회] 비명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김수이
문학평론가. 평론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서정은 진화한다』, 『풍경 속의 빈곳』,『환각의 칼날』 등과 공저 『글쓰기의 최소원칙』, 『<오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등이 있음.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일찌기 나는(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최승자의 등장은 1980년대 한국시단에 내린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기쁨과 희망이 아니라, 슬픔과 공포로 이루어진 역설적인 것이었다. 1980년대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국민에게 자행한 대학살(광주민주화운동)로 시작된 피의 시대였고, 폭력적인 시위 진압과 불법 고문과 극단의 저항인 분신 등으로 많은 목숨이 사라져간 죽음의 시대였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아니라, 밥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삶의 현장이 죽음에 짓눌려 신음하던 시대였다.
   최승자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이 피비린내 나는 세계에서 살 수 없는, 그러나 살아야만 하는 한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이다. 끔찍한 세계에 갇힌 연약한 인간은 처절한 비명으로써 세계에 대한 거부와 반대를 수행한다. 내용 없는 감탄사에 불과한 비명은, 그렇다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가? 당연히, 비명 자체만으로는 시가 되기 어렵다. 어떤 형태로든 비명을 언어화하는 전개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실체와 맥락을 말하는 과정에서 비명은 단어와 문장이 되고, 일탈과 파괴를 포함한 언어 체제의 한 용례가 된다. 언어이면서 언어 이전인, 동시에 언어가 아닌 비명(동물도 위급할 때 비명을 지른다.)은 이렇게 고밀도의 언어 구조물인 시의 영토에 편입된다. (조금 부연하자. 비명을 언어로 풀어내는 시 쓰기에서 비명의 언어화란 시적 파격과 문법 일탈은 물론, 각종 기호, 그림, 공백 등 비언어적 장치까지를 모두 활용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광주민주화항쟁이 진압된 527일을 기린 황지우의 시 묵념, 527는 완전히 텅 빈 공백으로 본문을 구성한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은 공백을 통해 침묵의 언어로 발화된다. 우리는 이 시에서 언어 이상의 언어를 읽으며, 텅 빈 공백의 언어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죽은 자들과 역사의 비명을 듣는다.)
   비명을 시로 쓰는 일은 어렵거나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다. ()언어와 언어 이전의 비명을 언어로 표현하면서도 비명의 절박함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는 일이므로, 비명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비명의 긴장은 약해지기 쉽다. 최승자의 시는 그녀의 등장 이전까지 상상되지 못한 도발적인 언어로 비명의 절박성을 생생히 형상화한다. 비문이나 비언어적 장치를 거의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형식의 파격으로 내용의 파격을 떠받치지 않음에도 최승자의 시는 전례 없는 파격과 충격을 독자에게 가한다. 시의 문장은 간결하고 논리정연하며, 시의 길이도 길지 않은 편에 속한다. 이 시에서도 빠른 리듬을 위해 너당신그대,” 붙여 쓴 것 외에는 별다른 형식적 파격은 발견되지 않는다.
   최승자의 시 쓰기는 야만의 현실이 촉발하는 동물적인 비명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분열을 견디며 그녀는 자신과 삶을 송두리째 걸고 시를 쓴다. 최승자의 비명-시는 오염된 세계와, 그 속에서 썩어가는 자신을 향해 폭주한다.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진 세계의 부정성을, 최승자는 그 세계에 속해 있는 자신을 무섭게 부정하는 것으로 맞선다. 최승자의 시는 1980년대 한국의 극악한 정치 상황을 넘어 현대문명과 자본주의의 비윤리성에 대한 지독한 고발이자, 그러한 세계에 몸담고 살아가는 자의 혹독한 자기부정이 된다. 최승자에게 세계의 부정과 자기 부정은 뗄 수 없는 하나의 윤리적 행위다. 세계가 썩었는데 나만이 깨끗할 수는 없다. 세계가 죽었는데 나만이 살아있을 수는 없다.
   이 시는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서 만나게 되는 작품이다. 시 속에서 는 자신이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시체의 상태로 끝없이 썩어가고 있다고 진술한다. 도저한 자기 폭로의 주체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문장을 두 번 반복하면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의 죽음과 부패는 아주 오랜 시간을 뜻하는 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는 기댈 곳이 없었고(키워준 부모도 없이 쥐구멍에서 잠들었다.), 애써 실현해야 할 정체성(‘’)도 없었다. 곰팡이, 오줌 자국, 시체 등등 추악하고 버려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 였다. ‘우리를 주어로 하는 공동체에 소속될 수 없으며,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를 알지 못하며, 내가 사랑하며 함께 행복할 타자(‘그대’)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극단의 자기 부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승자는 타락한 세계에 태어난 것 외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 자신을 심리적으로 박해하고 처형함으로써 세계에 대해 강력한 부정을 수행한다. 세계와 를 동시에 부정하는 존재에게 분열파국은 정해진 수순이다. 이를 회피하지 않으며 끝까지 나아가는 것에 최승자 시의 위대함이 있으며, 그녀의 실제 삶도 시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물론 그녀에게 인간적인 두려움이 없을 리는 없다. 다른 시에서 최승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악순환, 즐거운 일기, 1984) 이 고백은 반어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 심리적 기제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최승자가 독 안에 든 쥐로 자신을 인식함에도 끝내 세계를 위협하는 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썩고 죽어가는 세계에 맞서 아무것도 아님죽음을 이행하는 최승자에게 죽음은 완료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그녀는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라는 진행형의 시제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서술한다. ‘의 존재와 삶은 하염없이 죽어 가고 있고, 살아있음의 증거와 감각은 지워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의 실존이 실체와 근거 없는 뜬소문으로 화한 세계에서 최승자는 어떤 희망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아님죽음을 살아 낸다.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며 끝없이 부패하는 삶의 방식은, 이 세계가 허락하지 않는 윤리적 삶의 급진적인 형태가 된다. 타락한 세계가 두려워하고 금지하는 것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을 각성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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