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 위기와 변동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백여 년 이상 전개된 14세기 전반기부터 15세기 중반기까지의 시기는 사실 유럽사회의 대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비단 백년전쟁을 통한 국가체제가 등장하는 과정 외에도 이와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대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든 경제상황, 국지적으로 연속된 흉작과 장기적인 기근, 그리고 유럽인들을 가공할 공포로 몰고 간 흑사병 등이 바로 이러한 대변동의 주요한 요인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은 14세기 중반의 유럽사회는 더 이상 13세기의 ‘평화로운’ 중세사회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유럽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흔히 ‘중세 말’이라고 일컫는 이 시기는 11-13세기의 중세 전성기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며 그 파국적 성격은 이후 전개될 근대문명의 묘판을 이루게 된다. 중세는 근대의 기원인가? 아니다. 13세기까지의 시기가 중세를 대표한다면 그 중세는 근대와 전혀 다른 세계다. 하지만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러 전개되는 장기적인 굴곡과 변형의 과정에 어쩔 수 없는 시대구분의 요청으로 ‘중세’라고, ‘중세 말’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중세는 근대의 기원일 수 있다. 물론 이 기원이라는 말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단선적 과정의 시발점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파국적인 상황들의 복합적이고도 이질적인 중첩들이다.
경제위기
흔히 ‘중세 말 경제위기’라고 부르는 사태는 이미 13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개간사업의 중단이라는, 아주 단순한 경제적 경향의 결과로 일어났다. 1270-80년대까지 중세 유럽사회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바로 개간사업이었다.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원격지 무역 외에 인민 대다수의 삶이 이루어지는 농촌사회의 번영은 바로 농경지의 확장과 이에 따른 수확량의 증가, 또 그 결과로 진행된 인구증가 사이의 선순환적 되먹임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세 동안 로마 말기에 울창했던 숲은 모두 없어져 갔고 급기야 13세기 말에는 더 이상 개간할 땅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토지·곡물·인구 사이의 팽창적 순환에서 토지확장에 급제동이 걸리자 곡물과 인구는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이미 13세기 동안 이루어지고 있었던 팽창의 불균형이 거대한 위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즉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던 토지와 곡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인구를 간신히 부양하고 있었다. 이는 1인당 토지보유 면적의 감소와 맞물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13세기에 꾸준히 지속되던 개간사업은 이 불균형을 간신히 지탱하였는데, 바로 이 개간사업이 종료되자 늘어나는 인구를 토지와 식량이 현격하게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말 농민들의 영양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간사업의 충격이 바로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3세기 말 14세기 초까지 진행된 점진적인 디플레이션을 낳았다. 이러한 와중에 1314-1317년 동안 유럽 북부지역에서는 냉해로 인한 흉작이 발생하여 치명적인 대기근 상태를 초래하였다. 사실 파종한 종자 대비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던 중세사회에서 수확한 곡식 중 이듬해의 종자를 제외하고 식량용 곡식에서 그해 소비량을 제외하고 비축할 곡물은 넉넉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년 이상 연속된 기근은 커다란 식량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흉작이 유럽 전역에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유럽 전체는 수확량이 인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맬서스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고 곡물가 상승과 디플레이션이라는 장기적인 경제침체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잉글랜드와 특히 프랑스에서 이러한 상황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와 전쟁의 간접적인 효과인 조세에 의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욱 악화되어 나가고 있었다.
흑사병
경제침체와 사회적 불안감은 전쟁으로 고조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파국으로 이끈 것은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흑사병이라는 유럽 외부의 충격이었다. 1334년 원나라 중부 후베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새로운 전염병이 13년간 이른바 ‘13세기 세계체제’1)의 다원적 교역로를 파괴하며 아시아를 지나 그 경제체제의 끝자락에 위치한 유럽에 도달하였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흑사병이 감염된 경로는 지중해 지역을 둘러싼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11회 지중해 세계의 라이벌들 참조). 1346년 킵차크 칸국이 흑해 지역에 위치한 카파(Caffa)시를 공략하면서 아시아에 널리 퍼진 흑사병균으로 일종의 세균전을 펼쳤고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제노바 상인들은 전화를 피해 흑사병에 감염된 채로 1347년 제노바와 인근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이 새로운 전염병에 어떠한 면역체계도 갖고 있지 못하던 유럽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삽시간에 흑사병에 감염되어 나갔다. 불과 3-4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유럽인구가 흑사병에 전염되었고 지역마다 편차가 심하긴 하지만 적게는 1/3, 많게는 2/3 이상이 사망하였다.2)
동아시아에 비해 인구가 많지 않았던 중세 유럽에서 이러한 대규모의 죽음은 찾아볼 수 없는 충격적인 현상이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에도 전투는 어디까지나 기사와 용병들만의 몫으로 일반 농민들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13세기 초 큰 전투 중의 하나였던 부빈전투만 하더라도 프랑스군 1만 5천명 대 영국-신성로마제국 등 동맹군 2만 5천 명의 싸움이었고, 흑사병 직전에 벌어졌던 1346년의 크레시 전투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7세기에 당나라군 30만 명과 고구려군 10만 명이 격돌했던 안시성 전투와 비교한다면 인구의 차원에서 유럽의 전쟁과 전투는 상당히 작은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유럽에서는 17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전투규모가 수십만의 차원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즉 유럽에서는 중세 내내 대규모의 살상 사태는 커다란 적대적인 두 진영 사이의 전쟁에서도 거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흑사병은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계곡으로 밀어 넣었다. 부자이건 가난하건, 귀족이든 아니든, 선량하거나 악하거나 건강하던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검은 반점이나 부종과 함께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당시의 어떠한 기준으로도 이러한 죽음은 중세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변고였고 이를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한 다양한, 그리고 종종 위험한 담론들과 사회적 행동들을 산출해 냈다.3)

흑사병의 확산(1347-1351년)
좌측: 녹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흑사병의 피해가 없었던 지역이다. 바르셀로나 위쪽의 피레네 산맥 지역과 북동부유럽은 기후 및 희박한 인구밀도로 인해 흑사병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플랑드르의 브뤼주와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예외적으로 철저한 도시 출입통제 정책으로 흑사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우측: 흑사병에 걸린 성직자들을 치료하려고 하는 주교의 모습.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었던 만큼 중세 유럽인들은 다양한 의술과 의학이 발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사병 치료만은 초월적인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에서는 감염자들과 비감염자들이 모두 모여 회개를 하는 특별 기도회와 미사 등이 종종 개최되었다. 문제는 흑사병이 호흡기로 감염되는 병이었기에 도리어 교회와 미사는 감염확산의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위의 그림에서는 아직 감염되지 않은 오른쪽의 주교가 감염될 위험에 처해 있다.
흑사병이 당대에 초래한 결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묶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회·경제적인 것이고 둘째는 문화·심성적인 것이다. 첫 번째 종류의 결과들은 무엇보다도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해 발생되었다. 너무나도 풍부하던 노동력이 터무니없이 줄어들게 되었고 이제 총체적인 차원에서 인구는 토지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제구조가 변화하게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장원제와 영주-농노제가 자리잡았던 지역에서는 노동력의 희소화와 화폐경제의 확대라는 상황을 이용하여 신분해방된 자유농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 중 막대한 부를 취할 수 있었던 자들은 부유한 지주 및 농장주로 성장하였는데 프랑스의 라부뢰르(laboureur)나 잉글랜드의 젠트리(gentry) 계층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 그 연원을 두게 된다. 반면에 종종 생존자가 몇몇 남았더라도 더 이상 마을 공동체에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경우, 이 지역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가 부랑자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부랑자와 임노동자는 사실 실체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최저생계를 유지할만한 푼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상황적 구분에 불과했다. 부익부 빈익빈의 사태가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각종 사회적 무질서 사태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두 왕국 모두에서 흑사병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이후에는 왕국 전체에 일종의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려는 시도를 펼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임금과 물가를 안정시키고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1349년에서 1351년 동안 선포되었고, 특히 노동하지 않는 부랑민들에 대한 자선금지와 노동통제적 조치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러한 왕령들이 실제로 얼마큼 현실적 강제력을 지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이와 같은 생각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들에 의해 선언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생각들이 13세기까지의 중세 왕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14세기 국가체제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서유럽 지역과 다르게 중세 내내 자유농이 종재했던 동유럽 지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구감소로 세수가 줄어든 동유럽의 귀족들은 기존의 자유농들을 폭력과 강압에 의해 예속화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흔히 재판농노제라고 부르는 상황이 농노제가 뿌리 깊지 않았던 동유럽 지역에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는 19세기까지 지속되어 나가면서 훗날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이 지역국가의 ‘계몽군주’들이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발돋움하려는 이상에 대한 현실적 족쇄가 되었다.
두 번째 부류의 결과들, 즉 문화 및 심성적인 차원에서도 흑사병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단 대규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중세인들 나름대로 그 이유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고 그 이유들을 찾는 과정은 종종 민간의 차원에서는 현대의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매우 먼, 그러나 현대사회의 군중심리와는 여전히 가까운 사회적 현상들을 낳았다. 먼저 이 대재앙은 누군가의 탓이었다. 먼저 그것은 남 탓이었다. 라인강변과 에스파냐 일부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우물 등에 독을 타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수 백 곳의 유대인 마을들이 습격을 받았고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다음으로 그것은 내 탓(mea culpa)이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흑사병은 물질적 풍요에 눈이 어두워 신앙심이 약해진 기독교사회 전체에 신이 내린 징벌이었고 이러한 신의 분노는 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인 회개를 통해서만 완화될 수 있었다. 잔혹한 채찍고행행렬이 일부 지방에서 조직되었고 이는 사회적 흥분상태를 조장하곤 하였다. 유대인 박해와 채찍고행이라는 극단적이고도 유혈낭자한 현상들은 결코 질서유지를 원하는 지배자들의 의도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것은 발작적인 사회적 소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황과 군주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행위들을 금지하였는데 그럼에도 사회적 불안감이 쉽사리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죽음에 대한 첨예한 각성으로 이어졌다. 사실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일부 사회 엘리트, 즉 주로 귀족들 사이에서 흑사병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각성을 통해 14세기 중세인들이 깨달은 것은 죽음의 개인성과 보편성이라는 이중적 측면이었다. 죽음은 어디까지나 ‘나’의 죽음이면서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이었다. 죽음 앞에 선 개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첨예한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찾아올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심성적 기반을 장기적으로 마련하게 된다. 나 자신의 현세적 삶과 구원에 대한 각성, 그것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만의 문제로 제기된다. 이후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또는 “바니타스(Vanitas)”와 같은 주제들이 르네상스 이후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는다.

‘3인의 생자와 3인의 망자(Trois vivants et trois morts)’
: 본 드 뤽상부르(Bonne de Luxembourg)의 『시도서』 중 (1349년 이전)
본 드 뤽상부르는 프랑스의 왕세자비로 그의 남편은 장 2세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역임하고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카를 4세의 여동생이었다. 왕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위생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중세에 그녀 또한 흑사병의 마수를 피하기는 힘들었다. 1349년 사망했던 그녀는 위와 같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시도서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극적인 대비에 대한 의식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이것 외에도 14세기 출판과 독서문화에 있어서도 귀중한 사료로 제시되곤 한다.
죽음은 또한 우리 모두의 죽음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현실에서 그리도 떵떵거리던 왕족도 귀족도 고위성직자도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죽음의 행렬을 뒤따랐다. 죽음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무차별적 힘을 지닌 존재로, 해골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사람들의 목숨을 추수하는 거대한 낫을 든 ‘죽음’, 일상의 질서를 미친 듯이 파괴하는 ‘죽음’의 행렬 또는 무도(舞蹈)는 신과 죽음 앞에 결국 같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보여주게 된다.4)
이렇게
14세기 전반기
,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유럽은 사회
, 경제
, 심성 전 차원에 걸쳐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으며
11-13세기에 구축된
‘중세적
’ 질서들이 해체되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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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닛 아부-루고드,『유럽 패권 이전- 13세기 세계체제』, 박흥식, 이은정 옮김(까치, 2006).
2) 단순한 수치로만 이야기하면 별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위의 수치는 각 집마다 두세 명씩 죽어 나갔다는 끔찍한 상황을 의미하며 심한 경우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통째로 무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흑사병 이전 14세기 초 프랑스 인구는 2천만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17세기 초 종교전쟁이 지난 후 평화로운 상황에서 증가한 인구가 8백만 정도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평균적으로 2/3가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3) 이와 같이 설명하기 힘든 끔찍한 사건들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이야기 만들기의 메커니즘은 폴 리쾨르의 논지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1: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김한식·이경래 옮김(문학과지성사, 1999).
4) ‘죽음의 춤’이라는 현상으로 또한 이야기 되는 것이 이 시기에 라인강변의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이 춤을 추다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현상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데 중요한 점은 이것은 중세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 시기 라인강변 지역에 국한된 매우 독특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14세기 전반기가 지닌 극도의 긴장감 외에도 필자의 생각에 함께 고려해 봐야 할 점은 중세 이후로 라인강변(로타링기아) 문화권이 보여주고 있는 극단주의적 또는 신비주의적 태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