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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사르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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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2월 통권 010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3회] 사르후 전투

이훈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 청조의 만주지역에 대한 시각과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청대 건륭기 만주족의 根本之地 만들기」(논문), 『만주족의 청제국』(공역)이 있다.


1619년 3월 만주에서 신흥 후금과 명 · 조선 연합군 사이에 향후 동아시아 역사의 향배를 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사르후 전투였다. 이 거대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누르하치는 1583년 일개 소부락의 수장으로서 고작 수십 명의 인원을 기반으로 기병한 후 급속도로 여진 세계를 통합해왔다. 그는 기병한 지 6년만인 1588년까지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1593년에는 그의 건주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경계한 해서여진 4부와 몽고의 코르친 등 9개부의 연합 공격전인 이른바 九國之戰에서도 승리했다. 구국지전을 기점으로 해서여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 누르하치는 1599년 해서의 하다를, 1607년에는 호이파를, 1615년에는 울라를 합병했다. 해서여진을 합병해 나가는 동시에 동해여진의 와르카, 후르하 등에 대한 공세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다. 사르후 전투가 일어난 1619년에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여허를 제외하고 여진 세계 대부분을 병합한 상태였다.

명은 지난 2세기 동안 여진을 산산이 분리시켜 관리함으로써 여진의 통합을 막아왔지만, 이 정책은 작동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는 명 내부의 말기적 혼란상과 임진왜란 등의 외부적 여파로 인해 여진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진 원인도 있고, 누르하치 세력의 확대와 성장이 너무 급속했기 때문에 견제의 시점을 놓쳐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은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이 심상치 않음을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조선이 1595년 (선조 28)에 신충일을 누르하치의 도성인 퍼알라에 파견한 것은, 표면상 누르하치의 건주와 통교하기 위한 사절임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진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정탐하려는 목적이었다. 신충일은 귀국 후에 <건주기정도기 >를 작성하여 퍼알라의 제반 상황에 대해 조정에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가 벌어진 1619년의 후금은 신충일이 정탐한 1595년의 건주와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그 사이 20여년간 누르하치는 여진 세계의 대부분을 통합했고, 1603년에는 신충일이 다녀갔던 퍼알라에서 인근의 허투알라로 수도를 이전했다. 새로운 수도에는 병합한 각지 여진의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서 병력을 더욱 확충했다. 단순히 규모만 확대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여진인이 수렵할 때 10명 정도로 구성하는 임시 조직인 ‘니루 ’를 상설적인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도 여진사회의 구조를 뒤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수렵조직 니루와 이름만 같을 뿐 성격과 규모는 완전히 달랐다. 규모는 1니루에 장정 3백명으로 확대되었고,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은 니루의 구성원들의 행정, 납세, 군사 활동 등의 전반을 관리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씨족과 촌락을 대체하는 국가의 기간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이었다. 니루 약 25개를 총괄하는 조직인 구사 (旗 )는 국가의 최상급 조직이었고, 구사의 수장인 버일러들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최고위 권력자들이었다. 허투알라로 대거 이주된 여진인은 속속 니루로 조직되었다. 최초에 4개였던 구사에 4개의 구사가 증설되어서 총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된 것은 1615년이었다. 30여년 전에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사 수가 고작 수십 명이었으나 이제는 만 단위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가 일어나기 수년 전에, 누르하치의 국가는 인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이 일체화된 완벽한 ‘병영국가 ’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르후 전투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전년인 1618년 후금이 명의 요동 방어기지인 무순과 청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명에 대해 순종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누르하치는 1618년부터 명에 대해 ‘7개 대 원한 ’(nadan amba koro, 七大恨 )을 선포하고 공격을 감행하여 무순과 청하를 함락시켰다. 두 도시는 명이 여진을 방비하여 요하의 동쪽에 구축한, 개원 -철령 -심양 -요양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의 동편 전진기지였다. 두 도시의 함락은 곧 개원에서 요양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이 위협받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이 방어선상의 서쪽 후방에서 명의 요동도사가 주재하며 전방의 기지도시들을 통괄하는 본부 도시인 광령이 위협받는 것이었다.

명의 반응은 국내 정세의 혼란을 감안하면 즉각적이었다. 명은 즉시 전쟁 준비에 돌입하여 국내 각지에서 8만여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파견에 소극적인 조선을 압박하여 동원한 조선병사가 1만 3천, 해서여진 가운데 마지막까지 후금에 저항하고 있던 여허에서 동원한 병사가 2천 정도 더해져서 총 10만의 공격군이 준비되었다. 명은 부대를 네 개로 분리하고 네 개의 진격로를 설정했다.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사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네 부대 가운데 주력은 서로군(좌익중로군, 무순로)으로, 사령관은 산해관총병관 杜松이었다. 이 부대는 산해관, 保定, 薊鎭의 군대와 固原, 甘州, 陝西의 병력 등 약 3만 명으로 구성되었고, 무순을 출발하여 사르후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북로군(좌익북로군, 개원로)의 사령관은 개원총병관 馬林이었다. 이 부대는 개원로의 요동병을 주력으로 하는 약 2만 병력에 여허 병력 2천을 더해 구성되었고, 주력인 좌익중로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남로군(우익중로군, 청하로)의 사령관은 요동총병관 李如柏이었고, 요동진의 2만 5천 병사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청하로부터 鴉鶻關을 나가 훌란을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동로군(우익남로군, 관전로)의 사령관은 총병관 劉綎이었다. 이 부대는 山東, 浙江의 병력과 寬奠, 鎭江, 靉陽 등의 요동병으로 이루어진 약 1만 3천 명의 병력에, 조선의 병력 1만 3천을 더해 조직되었고, 관전에 집결한 뒤 동고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4로군 외에도 베이스 기지인 요양과 광령에 후방군이 대기했다. 명군의 총사령관인 楊鎬는 심양에서 총지휘를 담당했다.

4로군의 사령관들은 전투지역이 요동인 점을 감안하여 수년 전 가까운 조선에서 전투를 수행해 본 경험자들로 선발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전투경험이 풍부했고 작전지역에도 익숙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와 후금 장수들의 전투경험은 이들보다 더 풍부했다. 누르하치는 1583년 기병한 후부터 무수한 전투를 치러왔다. 국가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 일체화된 완전한 ‘병영국가 ’는 전쟁이 일상인 상태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국가였다. 백전노장 누르하치가 취한 전략은 아군의 분산을 최소화하고 분산하여 진격해오는 적군을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적군의 움직임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면서, 아군을 매우 빠른 속도로 기동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각지에 척후병을 파견하여 적군의 이동을 파악했고, 시시각각 입수되는 보고를 분석하여 후금병의 이동과 공격지점을 결정했다. 이 전쟁에서 후금이 동원한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대략 3-4만 명으로 추산된다. 누르하치의 기동전 전략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장의 지도와 주요 지명은 아래와 같다.


사르후 (sarhū, 薩爾滸, 식기장 /찬장 ) 
기린 산 (girin hada,
吉林山 /吉林崖 )
샹기얀 하다 (šanggiyan hada,
尙間崖, 하얀 봉 ) 
피여푼 산 (fiyefun alin,
斐芬山 )
압다리 언덕 (abdari ala,
阿布達哩岡, 상수리나무 언덕 )
푸차 (fuca,
富察 )
와훈 오모 (wahūn omo,
斡琿鄂謨, 더러운 호수 )
훌란 (hūlan,
呼蘭 /虎欄, 굴뚝 )
허투알라 (hetu ala,
橫岡, 가로 언덕 ) 
자이피얀 (jaifiyan,
界凡, 두물머리 /양수리 )
쇼킨 산 (šokin hada,
碩欽山 )
혼하 (
渾河, hunehe bira) 
瑪哈丹 /馬根丹 (만주어 미상, 현재 遼寧省 撫順縣의 馬郡村 )
得力阿哈 (만주어 미상, 현재 遼寧省 彰武縣의 得力村 )
[*지도의 출처는 임계순의 『청사』 (p.27)이고, 만주어 지명은 주로 『만주실록』을 참고했다.]

흔히 이 전쟁을 ‘사르후 전투 ’라고 총칭하지만, 사실 사르후 외에도 주요 전장만 다섯 곳이었다. 전장이 다수이고 전쟁에 동원된 병력과 전투의 규모가 방대한 면에서 볼 때, 이 ‘전투 ’는 ‘전쟁 ’이라고 불러야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전 기간이 1619년 음력 3월 1일부터 4일까지 겨우 5일간이라는 점에서, 이 전쟁은 ‘전쟁 ’이라 부르기가 무색하리만큼 속전속결이었다. 사르후 전투의 전 과정은 각개 전투별로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사르후, 기린 산 전투
    3월 1일 두송의 서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두송은 혼하를 건너 사르후를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한 후,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혼하를 건너 자이피얀을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후금 부대는 후방의 기린 산으로 후퇴했고, 두송은 기린 산을 공격했다.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의 주력군을 이끌고 사르후와 기린 산이 보이는 구러에 도착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었다. 누르하치보다 먼저 도착한 대버일러 다이샨과 버일러들은 기린 산에 고립된 후금군을 구원하기 위해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했다. 8기 가운데 사르후 공격에 6기가 동원되었고, 나머지 2기는 자이피얀의 명군을 감시했다. 후금군의 야습을 받은 사르후의 명군은 궤멸되었다. 후금군은 곧바로 사르후를 공격했던 6기와 자이피얀의 감시를 맡았던 2기, 기린 산의 부대로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명군은 궤멸되었고 두송 등의 장수들도 전사했다. 허투알라, 사르후, 자이피얀으로 이어지는 작전지역을 단 하루 만에 이동하며 공격을 전개한 후금의 기동력과 신속한 정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2. 샹기얀 하다, 피여푼 산 전투
    두송의 군이 궤멸된 무렵, 마림의 북로군은 샹기얀 하다에 도착해 있었다. 2일에 서로군의 궤멸 소식을 들은 마림은 상기얀 하다에 강력한 포진을 구축했고, 潘宗顔이 지휘하는 북로군의 제2부대는 가까운 피여푼 산에 진영을 구축했다. 후금의 다이샨은 300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마림 군의 강력한 진영을 보고 누르하치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1천명의 병사로 와훈 오모에 주둔하던 명 서로군의 전차부대 2천을 궤멸시키고, 즉시 상기얀 하다로 달려왔다. 양군이 격돌했고 전투는 혼전에 빠졌으나, 결국 속속 도착한 후금의 부대들이 즉시 참전하면서 명군은 붕괴되었다. 마림 군은 패주하면서 추격하는 후금군에게 학살당했다. 피여푼에 주둔한 반종안의 부대는 참전의 시기를 놓쳤고, 마림 군을 붕괴시킨 누르하치 군이 예봉을 돌리자 바로 섬멸 당했다. 여허 군은 개원 남쪽의 中固城까지 내려온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 철수하고 말았다.

3. 압달리 언덕, 푸차 전투
    누르하치는 명의 서로군과 북로군을 궤멸시킨 후,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켜 남로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남로군은 유정의 본대가 앞서 진군하고, 康應乾의 부대와 조선군이 뒤따랐다. 유정의 부대는 2일에 동고에서 후금의 니루어전 토보오가 이끄는 500명과 교전하여 50명을 죽이고 진격해나갔다. 후금의 다르한 히야가 이끄는 선발대는 토보오의 잔여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군과 만났고, 조금 후퇴하여 압달리 언덕에 포진했다. 이때부터 후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이끄는 두 주력군이 압달리 언덕을 양면 공격했고, 후방에서는 다르한 히야가 습격했다. 명군은 삼면의 공격을 맞아 전멸했고, 유정도 전사했다. 남로군의 본대를 전멸시킨 후금군은 푸차 들판으로 진격하여 남로군의 후위대인 강응건과 조선군을 공격했다. 강응건은 도주하고 조선군은 전투 끝에 투항했다.

이로써 5일간에 걸쳐 명의 4개 부대 가운데 3개 부대가 전멸해버렸다. 유일하게 이여백의 남로군만이 온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로 인한 명의 손실은 막대했다. 명의 기록에 의하면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이었고,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했다. 살아서 돌아간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 사르후 전투는 국가 꼴을 막 갖추기 시작한 신생 국가 후금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치른 전투였다. 그리고 후금은 살아남았다. 사르후 전투 이후에 명의 요동 전략은 방어전으로 전환되었고, 반대로 후금은 공세를 가속화해나갔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가 끝난 직후 여허를 공격하여 합병함으로써 여진 세계를 완전히 통일했고, 명의 요동 방어선상의 기지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해갔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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