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대화] 공공의 영역은 공과 사 ‘사이’에 있다 - 인문건축가 조성룡과의 대화 #2
확대 글자크게 축소 글자작게

2017년 04월 통권 072호 | 談+論

[대화] 공공의 영역은 공과 사 ‘사이’에 있다 - 인문건축가 조성룡과의 대화 #2

편집부
인터뷰 및 정리: 함돈균 / 사진: 박지나




<꿈마루>
 
   ‘공동’의 원칙이 부재한 사회

   함 : 그러면 이제는 선생님이 작업하셨던 일들을 가지고 큰 질문들이긴 하지만 화두가 되었던 지점들에 대해서 좀 여쭤볼까요. 그동안 해 오신 작업을 제가 좀 이렇게 나눠보니까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를, 그땐 아파트라기보다는 최초의 국제경기선수촌이었죠. 그러니까 공동주거지를 설계하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셨고 그 다음에는 또 제가 건축법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건축가가 공원을 짓는 일은 요즘 많지 않다고 하는데 선유도공원이라는 재생공원이 있었고, 또 꿈마루 같은 어린이대공원의 일부지만 공원에 대한 작업이 있으셨고요. 또 의재미술관, 소마미술관, 또 이응노기념관 같은 미술관 작업들이 있으셨지요. 또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동학기념관 설계도 시도 하셨고, 지금은 외국건축가가 지은 DDP건물 동대문운동장 부지 설계 작업도 있었구요. 또 역시 아깝게 실현이 되지는 못했는데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작업 국제설계전에도 참여하셨고요. 지금 성북동의 작은 길도 정리하고 계시고요. 그러니까 공동공간으로서 아파트, 놀이로서 공원, 기억과 전시 공간으로서 미술관, 뭔가 이어주는 공동공간으로서 길 같은 어떻게 보면 보통 건축가가 잘 하지 않는 그런 형태의 공공공간을 만드는 일을 많이 해오셨어요. 이 네 가지를 카테고리를 나눠서 어떤 화두를 가지고 계시는지 간단히 질문을 좀 해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먼저 지금 한국에 도시 주거공간의 지배적인 것이 되어있으면서 가장 문제도 많고 실제로 삶의 공간이 되기도 한 이 아파트라고 하는 공간에 대해서, 간략하게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혹은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이고, 그래서 어떤 부분을 인문적인 삶,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을지 질문 드리고 싶어요.
 
   조 : 우선 첫 번째로 아파트를 생각하면 두 가지 관점이 저에게는 좀 흥미가 있어요. 우선 도시화가 되면서 도시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니까 고밀화 되는 문제입니다. 도시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고밀화를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아파트가 도입이 된 거죠. 아파트라는 시스템이. 말 그대로 이렇게 한 채 한 채 집이 아니라 집을 복수의 세대로 한꺼번에 한 건물에다가 배치하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공동주택의 유형이라 그러는데 사실은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요. 말 자체로 ‘공동’이라는 말은 그렇게 합쳐졌다고 해서 공동이 아니라 뭔가 공동의 것이 있어야 되는 거죠. 공유하거나 공동으로 뭘 하는 행위나 물질성이나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모아만 놓은 것을 공동이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그래서 아파트를 ‘공동주택’이라고 하는 이 말부터 저는 고쳐야 된다고 계속 주장하는데 안 고쳐져요 몇 십년동안. 원래 일본은 집합이라는 말을 썼어요. 집합주택. 집단주택 뭐 이런 말도 쓴 적 있었고, 최근에는 그냥 집합주택이라고 많이 써요. 그리고 영어로 하면 멀티패밀리 하우징, 말 그대로 그냥 멀티패밀리. 집합이라는 말이 더 맞는 거죠. 공동이라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스웨덴이나 이런 데는 코옵주택이라 해서 coop 이런 게 있는 데 그것은 이것대로 하면 그야말로 그게 정말 공동주택이에요.
   예를 들면 그 사람들은 부엌을 같이 써요. 1층에 부엌하고 애들 기르는 것을 따로 큰 공간을 둬서 1층에 내려가서 같이 공유하고 같이 해 먹기도 하고 또 애들 기르면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섞이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생활의 일부분을 공동으로 해결하면서 서로 커뮤니티를 만드는 거죠. 옛날 농촌 공동체 그건 아니지만 그건 이제 국가가 상당히 많은 복지정책을 피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직장 다니면서 생활할 수 있게 공간자체가 그렇게 디자인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린 그건 아닌 거죠. 그래서 이 용어 정의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 됐다, 그렇게 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아파트라는 집단주택이 한국에서는 지배적 주거 형태가 되어있는데, ‘공동’의 삶의 무엇인지, 커뮤니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전혀 부재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80년대 엄청나게 많은 대단위 단지를 만들면서 이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바뀌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고층 고밀도로 바뀌는 거예요. 원래 고밀도의 개념은 밀도가 높은 거지 고층이라는 개념은 없었거든요. 바꿔 얘기하면 저층 고밀도도 있는 거예요. 중층 고밀도도 있고. 1950년대 60년대 미국이나 영국에서 엄청 많이 아파트를 지어요. 왜냐하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독일에서 돈을 많이 받았고. 그렇게 해서 국가에서 집 짓는 데에다 많이 썼어요. 전쟁 때 많이 부숴 졌으니까. 그러면서 고층 아파트를 막 지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실험을 해요. 고층아파트하고 중간하고 섞어서 짓다가 어느 순간에 고층은 안 된다, 생각을 하고 60년대 다 없애요. 60년대 이후에는 고층 지은 게 없어요. 한창 50년대에 짓다가 다 없애고 모두 저층으로 바꿔 버리는 거예요. 저층 고밀도는 유지를 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은 안하고 전부 고층으로, 70년 80년 이후로 계속 고층화 된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가 제가 아시아선수촌 설계할 때도 그게 18층, 최고 18층이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제일 높은 아파트였어요. 그 다음에 아시아선수촌 끝나고 2년 후에 25층 아파트를 강남에 설계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계된 고층주상복합건물이지요. 제가 제일 먼저 했어요. 그러니까 저도 강남 주상복합건물, 고층화의 선두주자예요.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유럽에서는 막 했기 때문에. 제가 공부할 때가 60년대거든요. 60년대니까 어쩌다 외국잡지 보면 막 고층아파트 짓고, ‘야, 우리도 한번 해야지’ 하는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었죠. 그게 구현된 게 아시아선수촌인데 그 다음에 보니까 외국은 다 없애는 거예요. 지금은 안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이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저도 생각을 바꾸게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한 게 없어요. 그 한 몇 개 해놓고서는. 그러니까 고층을 제일 먼저 했음에도 그 다음에는 이건 아니다, 하고 저층에 대해 골똘하게 고민하면서 그 이후로는 저층이면서 조그만 것. 큰 단지가 아니라 작은 커뮤니티 하는 걸 몇 개 했는데 그런건 한국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높이 쌓는 것에 열광했죠. 지금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그래서 제일 큰 문제가 고층 고밀도에 대한 반성 혹은 대안 이게 있어야 되는데, 왜 서양 사람들은 고층을 버렸느냐를 생각하면, 고층이 도시 고밀화에 많은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환경을 총체적으로 해친다, 이런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런 결론에서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공동공간에서 타인의 삶에 대한 배려와 공존에 대한 관점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자기 집이 높으면 자기는 전망도 좋고 좋지만, 그 주변에 있는 게 다 헝클어지는 거죠. 그림자가 많이 지고 바람이 가다가 거기 이상한 골바람이 생기고, 앞에 보면 전망이 답답하고 그래서 안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런데 우리는 그거 상관없는 거예요. 주거라기보다는 아파트가 부동산으로 인식되고, 재산으로 언제든지 팔면 되니까요. 공동이라는 말은 붙여놓고 공동의 삶에 대한 원칙이나 에티켓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특히 도시에서 단지화 된 아파트는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요. 단지라는 것은 이렇게 섬처럼 도시에 뚝뚝 모여 있으면서 그 단지는 담을 높게 쌓고 자기들만 사는 거잖아요. 그럼 그 단지 옆에 작은 집들이 많잖아요. 그 작은 집들은 전부 그림자, 엄청난 그림자가 집니다. 철저하게 벽을 쌓은 고립된 단지와 대비되면서 이런 주택 지역은 왜소화되지요. 그런데 끊임없이 건설회사는 고층을 계속 하기 위한 연구를 해요. 그게 잘 팔리고 또 이윤도 많이 남으니까. 그런데 거기 함정이 뭐냐면 전체로서 도시환경은 계속 나빠진다는 거죠. 주변 환경과 이웃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고요. 서양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에요. 알면서도 이건 도시의 환경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스톱을 한 거죠.
   그래서 소위 인기 브랜드 아파트, 이상한 영어 이름 붙인 그런 아파트를 보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적어도 인문적 관점으로 보면 그렇죠. 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은 나는 여기 산다, 이런 괴상한 허위의식을 갖게 되고, 시장은 그런 허위의식을 상품 소비를 위한 메커니즘을 통해 계속 몰아가는 거죠. 저급한 소비의식과 허위의식이 공동체 의식을 대체합니다. 요즘 대단지 아파트들은 중간에 공원 같은 것을 만드는데, 실제로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주민들은 신경을 쓰지 않지요. 회사의 몫이 되기 때문에 관리비도 올라가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동공간의 성격을 띤 것이 커뮤니티에 대한 어떤 공동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을 지적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아파트에서의 문제는 미리 형태를 일률적으로 만들어놓고 파는 거니까 지금 라이프 스타일에 안 맞는다는 거죠. 핵가족화라든가, 세대구성의 다양성 등이 없고요, 이건 집과 생활의 실재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이고요. 더 화려해지고 더 고급스러워지기는 했지만 본질적인 생활하고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계속 그렇게 상품을 팔아놓고 마치 그런 상품을 가져야만 좋은 것처럼 계속 우리가 인식을 하게 만드는 그런 소비사회의 문제죠. 이제 앞으로 걱정이에요. 이렇게 많이 지은 아파트가 점점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고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또 고령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되느냐, 이 문제도 심각한 거죠. 그런데 최근에 세곡동에 보금자리주택이라는 아파트 하나가 세워졌어요. 그 아파트를 일본 사람이 설계했는데 일본 건축가가, 그 사람이 제안한 게 뭐냐면 노인 세대하고 고령자하고 젊은 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어야 된다, 이 사람은 늘 주장을 그렇게 한 거예요. 고령화 사회가 일본은 이미 먼저 왔고 노인들을 돌볼 자녀가 없다는 거죠. 자녀수도 모자라고 그러면 이 노인들을 사회가 케어를 해야 된다, 보호해야 된다, 라는 게 이 사람의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그런 공동주택인 경우에 노인과 젊은 세대가 어떻게 같이 사나, 그걸 고민해야 된다, 그걸 실천한 거예요. 그래서 노인 세대는 저층, 그게 저층하고 고층 아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저층에 노인세대, 고층에는 젊은 사람.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살다가 회사에 가거나 어디 나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복도식으로 되어 있어서 그 노인들 세대를 지나가는 거예요. 재미난 것은 그 노인들 세대 현관이 유리예요, 철문이 아니고. 노인들이 프라이버시가 뭐 있어요. 그러니까 노인들 세대 앞으로 지나가면서 그 노인들의 상태를 케어 하는 거예요. 거주하는 사람의 특성에 따라 안전과 프라이버시 문제를 구체적으로 사고한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이 몇 년 전부터 계속 책에서부터 주장하던 거예요. 그 주장을 요번에 실현을 시켰어요. 그래서 현관문을 다 유리로 했다고 그러는데 난리가 났대요. 현관문을 유리로 한 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어떻게든 그걸 관철을 시켜서 유리문을 다 달았고, 아마 외국 건축가니까 주장이 관철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앞으로 주의 깊게 한번 봐야 돼요. 개념이 굉장히 좋잖아요. 그러니까 사회가 바뀜에 따라 주거의 어떤 것도 바뀌어져야 되는데 우리는 지금 그게 없는 거고, 우리 스스로가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이제 앞으로 과제죠. 아파트와 집합주택, 공동주거 형태에서도요.


 
   함 : 아파트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공동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참 배우는 게 많습니다. ‘집’이라는 게 정말 생각해 볼 점이 많네요. 물질적으로 구현된 생활의 형태가 어떤 원칙에 기초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중요성도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그러고 보니 삶의 실재에 있어 아무런 원칙이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 이후에, 그리고 대통령 탄핵정국을 지나면서 시민들이 ‘이게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만히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일상에서 ‘이게 사회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드는 말씀이시네요.
   너무 큰 주제들이라 질문을 일일 드리기가 송구합니다만 ‘공원’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해주실 중요한 문제의식이 있으신지요.
 
   조 : 공원도 공공 공간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동주택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안해주신 공동주택, 공원, 미술관, 전부다가 근대도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거라는 걸 우선 상기 드리고 싶어요. 그 전에는 없었어요, 없는 거예요. 그 전에는 집하고 건물이죠. 건물에 집이 있고 3층엔 집이 있고 1층엔 가게고 2층에는 뭐 만드는 거고. 전부다 그렇게 해서 집이라는 게 한꺼번에 되는 게 옛날 서양이예요. 근대화되면서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집터와 일터가 구분이 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생기면서 도시에 이런 공공 공간들이 필요하게 된 거죠. 도시에 노동자를 위한 주거로 아파트가 생겨야 되고, 공원도 생겨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전부다 농촌에서 일터를 찾아서 도시로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 사람들이 자기 고향에서는 지천에 깔린 게 산이고 들판이고 물인데 도시에는 그건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번쯤은 릴렉스 할 수 있는 것으로 공원이 생겨나죠. 공원은 대부분 그 전에 귀족이나 영주들이 갖고 있던 큰 영역, 자기들이 거기서 사냥하고 그런 게 다 시민사회가 되면서 공원으로 바뀌죠. 우리도 왕의 궁이라는 게 공원이 되잖아요. 그런데 유럽에 공원이 생겼다고 하면 그건 그 사회 변화 과정에서 맥락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그런 것 없이 갑자기 그냥 근대도시의 어떤 아이콘처럼 도시에는 공원이 있어야 된다, 라는 식으로 일제시대에 생겨나죠. 그래서 파고다공원이라든지 일본사람들이 효창공원 이런 걸 세웠죠.
 
   함 : 창경원 같은 동물원도 마찬가지죠.
 
   조 : 네. 창경원은 궁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린 거고, 원래 없던 것은 주로 운동시설이 있고, 효창공원 같은 경우는 운동장이 있고 거기에 공원이 생기고 하는 식이죠. 그렇게 해서 전에 있던 큰 오픈 스페이스를 공원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결국은 노동자계급들, 특히 노동자계급들이 도시에 와서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설로 만든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근대화라도 어떤 시간적인 차이나 속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이 개념도 뚜렷하게 들어와 있지 않은 거예요. 공원이 뭐냐, 공원이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는가가 서양하고 비교하면 다른 거죠. 그래서 사실은 제가 건축가로서는 우연히도 해방 후에 최초로 공원을 설계해서 만든 셈이 됩니다. 아시아선수촌 하면서 거기에다 공원을 같이 껴야 된다고 그래서 아시아공원을 조그마한 걸 만든 거죠. 그래서 그때 공원이 뭔가, 이 고민을 우리가 많이 안 해 보았는데 제가 많이 해 볼 기회가 된 거죠. 우리는 공원 그러면 나무 많고 녹지가 많고 벤치 있고 뭐 이런 걸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나가야 되는 거예요. 공원은 지역에 따라 다 다른 거예요. 어떤 사람이 사는가, 그 지역에는. 본래 공원은 차타고가서 가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 걸어서 도보로 또는 저녁에 슬슬 편하게 나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아주 기분 좋은 녹지 공간, 이게 공원인데 우리는 이런 고민을 못한 거죠. 한국의 경우 공원이라는 것은 그냥 나라에서 만들어주면 좋은 것, 뭐 이런 정도로 생각을 하고 이 역사도 굉장히 짧아요.
   그래서 아시아선수촌 하면서 공원 하나 해봤고 그건 뭐 조그만 공원이긴 한데, 70년대 80년대 이제 집을 너무 많이 짓게 되면서 건축가들이 공원을 설계할 수 있는 것을 다 놓친 거예요. 집 지을 게 너무 많으니까 정부에서 200만호하고 뭐 엄청나게 많으니까 공원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거예요. 원래는 다 공원은 설계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은 법으로 공원은 건축가의 영역이 아닌 것이 되었죠. 히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우연히 그래도 옛날에 그 아시아선수촌 하면서 거기다 공원을 집어넣는 그런 지침이었기 때문에 공원을 했었고, 그 다음에 어떤 그런 거 저런 거로 해서 이 공원을 설계하는 조경회사하고 가깝고 그래서 다시 재생공원 선유도공원을 하게 된 거죠.
 
   함 : 선유도공원은 요즘 유행하는 재생건축의 개념을 거의 최초로 도입한 공원이고, 해방 이후 한국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도 뽑혔지요.
 
   조 : 네. 선유도공원 설계 때는 한강개발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건 시장 때 한강근처에 있는 섬들, 거기에 있는 섬들이라는 것은 선유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난지도도 있는데 원래 섬이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잘 정비해서 공원으로 만들자, 그래서 처음 사업이름이 ‘공원화’ 사업예요. 공원이 아니고. 그게 공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검토해서 공원으로 만들자 하는 게 그 사업이었거든요. 이건 나중 얘기지만 동대문운동장 부지 설계 프로젝트 DDP도 원래 공원화 사업이에요. 그 다음에 지금 서울역 고가도 공원화 사업이에요 전부다. 공원이 아닌 것을 공원으로 만드는 사업이거든요. 그러니까 공원이 그만큼 도시에서 필요하게 되었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에는 지금 여러 개의 공원이 있는데, 선유도 공원 이후에 공원은 빈 터에다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시설이 있던 곳에 다시 새로운 필요에 의해서 만든 공원이 있을 수 있다는 도시재생, 재생공원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안하게 된 공간이 되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시민들이나 건설업자나 건축가들이나 본래 공원은 한국에서 관심이 없는 공간입니다. 개인 부동산이 되지도 못하고 건설이익이 있지도 않고, 예술적 폼이 나지고 않고 무엇보다도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사회이기 때문이지요. 요즘에나 유행처럼 공공건축 그러지만요. 저는 도시에서 오픈 스페이스라는 게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같은 경우는 이미 조성된 공원 안에 어떤 공간을 새로 바꾼, 그건 공원의 개념보다는 다시 고쳐 쓰는 그런 개념이니까 조금 다르긴 한데 어쨌든 제가 건축가로서는 공원을 제일 많이 작업한 걸로 되어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역 고가>
 
 
   공과 사 ‘사이’에 공공이 있다

   함 : 미술관 이야기도 더불어 해주시죠.
  
   조 : 미술관도 공원과 마찬가지예요. 전에는 루브르, 대영박물관 다 옛날 궁이잖아요. 그러니까 귀족이나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쓰던 공간을 바꾼 거예요. 바꿔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컬렉션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거죠. 이 공유 과정이 역사적으로 시민사회 형성,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 과정 속에서 자연스러운 건데, 우리는 이것도 역사가 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는 총독부를 박물관으로 썼잖아요. 그러다가 아마 미술관, 박물관 세운 게 겨우 80년대부터 시작일 거예요. 지금 현대미술관을 과천에 세운 것도 80년대고. 우리에게 미술관 역사는 그때쯤부터 시작이 돼요. 미술관 붐은 이제 90년대에나 일어나는 거죠. 이 90년대랑 2000년대, 21세기에 드디어 이제는 우리도 지역에 미술관이 생겨야 되겠다, 하는 열기가 생겨났고 그때 했던 것이 지금 의재미술관입니다.
 
   함 : 의재미술관도 몇 년 전 건축전문가들이 뽑은 해방 후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선정이 되었죠?
 
   조 : 그렇습니다. 그때도 운이 좋아서 어떻게 광주에 실현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공원하고 비슷해요.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미술관을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는 거예요. 전에 있던 것 다 쓰고 서양에서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뭐 옳은 거다, 맞는 거다 생각을 한 거죠. 더 의문을 제기 안 한 거죠. 사실은 유럽도 미술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꾼 게 퐁피두센터에서 일 거예요 아마. 퐁피두도 73년인가 그렇거든요. 옛날 파리라는 게 월드시티잖아요. 거기에 이상한 거 하나 들어서면서 전혀 새로운 맥락으로 전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게 퐁피두미술관이고, 미술관의 개념을 그 전하고 완전히 바꿔버린. 그렇게 의미가 있다고 보면 우리는 미술관을 지으면서 별로 개념을 바꾼 게 없어요. 그냥 비슷하게 지은 거죠. 현대미술관 뭐 어디 국립박물관, 그렇게 새로운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퐁피두센터만큼 새로운 시대의 미술관, 이런 개념이 없는 것이 원천적으로 미술관에 대한 개념 자체가 그 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전범이 있어야 그 다음에 뭘 한참 운영해 보다가 아 이거 아니야, 이렇게 바꿔볼 텐데 한 번도 미술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형태나 뭐 이런 걸로만 따라가려고 그러는 거죠. ‘역(station)’도 마찬가지예요. 역도 우리가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근대도시의 표상이 역인데 역을 지어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ktx역이 저렇게 괴상한 형태가 된 겁니다. 지금 문제는 우리가 무언가를 제대로 해 본 경험이 없다는 걸 인식하고 개념부터 우리 경험과 필요에 근거해서 제대로 해보겠다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껍데기만 베껴가면서 마치 우리가 전부다 해본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거죠.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제대로 해 본 경험이 없다는 걸 지금이라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재미술관을 하면서도 엄청 힘들었어요. 우선 근본적으로 내가 아는 미술관에 대한 것하고 너무 다른 거예요. 운영하는 사람들은. 미술관이 무슨 이윤이 남아야 된다거나 뭐 굉장히 실용적인 공간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죠. 미술관은 그게 아니잖아요. 국민의 세금으로 그걸 지어서 시민들한테 주민들한테 뭔가 이렇게 여가시간에 정신적인 함양을 하기 위해서 고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아니라 그냥 마치 갤러리처럼 쉽게 인식하고, 컬렉션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술관은 컬렉션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얼마나 중요한 것을 소장해서 그걸 시민들한테 보여주는가. 거기에는 연구라는 것도 들어가야 되죠. 연구하고 계속 보수하고 잘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게 미술관인데, 운영자들은 완전히 무슨 전시 공간으로 생각을 해요. 미술관은 실제로는 안 보이는 데가 더 중요해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미술관 연구를 해 본적이 없어서 그래요. 큐레이터가 없는 미술관이 수두룩해요. 있어도 아주 뭐 형편없는, 실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말로만 큐레이터이고요. 미술관이 제일 중요한 게 큐레이턴데 큐레이터라는 직업도 우리나라는 좀 불분명하고. 그래서 현대미술관도 계속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잘 안 되는 거예요. 국가나 도시에서 어떤 것이 시설을 통해서 뭔가 시스템을 작동할 때 그 전에 있어야 되는 전범이나 과정이 분명히 있어야 되는데. 이걸 전부다 이렇게 뛰어넘고, 무언가 있는 것처럼 허세를 떨고, 기본도 모델도 없으면서 지금 가장 최고를 만들려고 하니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소마미술관>

   함 : 제가 지난 달에 이 코너 인터뷰를 하면서 이론물리학자 김상욱교수 인터뷰를 했는데, 그 분 말씀이 선생님 말씀과 비슷했습니다. 스마트폰 가지고 다니고 인터넷 기반 시설이 좋고 하니까, 마치 한국이 대단한 과학강국이나 합리화된 사회처럼 착각을 하는데, 일상생활에서 교육에서 기본적 시스템의 합리화도 안 되어 있고, 합리적 근거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미신적이고 권위주의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면서, 실제 삶에서는 근대화도 아직 안 된 사회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너무 많은 과제들이 우리에게 산적해 있고, 저 역시도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인문건축가라고 하는 이유를 이즈음 되니까 더 절실히 느끼게 되고요, 참 큰 스승이신 것 같아요.
   그럼 다시 드리고 싶은 질문이 어떻게 보면 아까 공원도 그렇고 미술관도 그렇고 어떤 공간을 공공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도 일종의 집이라는 거, 이런 공공시설도 공공기관이나 공공시설도 ‘거주한다’ ‘산다’는 그런 관점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까요.
 
   조 : 글쎄 뭐, 우리가 거주라는 걸 그렇게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집’이라는 개념에는 들어갈 수 있다고 봐요. 집은 굉장히 포괄적이라고 보거든요. 집 그러면 큰 것도 집이죠. 근데 거주라는 말은 조금 더 좁혀지는 것 같은데, 어찌됐든 특히 공공 공간, 제가 그 부분에 맞춰서 좀 설명을 하면 이 공공 공간에 대한 이해가 우리 사회가 굉장히 모자라요. 공공 공간이 뭔가. 공공을 위해서 공공이 만드는 어떤 공공적인 것. 뭐 이런 것에 대한 해석을 좀 명확하게 해야 되는데 대부분 보면 공공을 자꾸만 공과 사의 개념으로 봅니다. 공(公)을 공공(公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좀 다르잖아요. 공공과 공은. 퍼플릭(public)을 공공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이게 왜 자꾸만 이렇게 우리가 어긋나는가. 그러니까 공과 사가 중간에서 같이 어울리는 중간영역이 존재해야 되는데 우리는 중간영역이 항상 비어있거든요. 이거 아니면 저거, 그러다 보니까 서로 갈등만 생기는데 그 공공이라는 뜻에 예를 들면 오픈이라는 말도 있고 또 이렇게 투게더(together), ‘함께’ 라는 것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책 쓴 것을 보니까 조선시대에도 공공이라는 단어를 썼답니다. 조선실록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온다 하네요. 그러니까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을 나중에 신하가 충신이 계속 엎드려서 그것을 못하게 할 때 그 ‘공공’이라는 단어가 나온대요. 그러니까 왕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신하가 끝까지 반대하면 안하는 걸로, 그게 공공이래요.
 
   함 : 어떤 ‘대의명분’ 같은 거와 통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공공은?
 
   조 : 네. 조선실록에는 그렇게 된대요. 그래서 그 공공은 같이 하는 거지, 어떤 한 사람이 베풀거나 그러는 것도 아니고, 위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공공을 동사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이유는 같이 해야 되는 거지, 어떤 한쪽에서 이렇게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공과 사하고는 좀 차이가 있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공공 공간이라는 것은 시민들이 중요합니다. 국가나 단체에서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걸 쓰는 주체는 시민이기 때문에 시민이 그 ‘공공’을 ‘같이 해야 된다’는 거죠. 같이 잘 써야 되는 거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공과 사 개념이 둘 다 명확치가 않습니다. 둘 다 약하기 때문에 그 중간 사이 영역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고요.
 
   함 : 공공이 공과 사의 ‘사이’ 영역이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영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고, 이분법 개념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영역이지만 공존이라는 건 결국 그런 보이지 않는 영역을 발명하고 보존하고 발전시킬 때만 가능한 것 같아요. 사회의 진정한 성숙도 결국은 그 모호한 영역에 대한 아이디어와 책임감, 자율성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와 관련이 되고요. 문화적인 영역이기도 하고요.
 
   조 : 그래서 서양의 도시 발달에서 공공역량에 대한 것을 들여다보면서, 사실은 성북동 일도 그렇게 하고 서울역고가도 그렇게 했지만, 도시에서 제일 필요한 게 앉거나 드러눕는 장소래요. 특히 고밀도 도시에서는. 여유가 많은, 인구가 얼마 안 되는 그런데 말고, 우리처럼 몇 천만이 사는 이런 도시에서는 도시 곳곳에 앉거나 드러눕거나 하는 ‘모호한’ 장소의 디자인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드러누우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도 많고 노인네는 조금만 걸어도 힘들기 때문에 잠깐 드러눕는 장소가 필요하지요. 꼭 앉는 벤치만 있는 게 아닌 거예요. 미국에서는 그런 걸 중요학 생각하죠. 화단 가장자리라도 좀 넓게 해서 드러눕거나 뭐 이렇게 해서. 이런 걸 보면 꼭 규칙적인 이런 시설만이 아니고, 공공시설이라는 게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보통은 벤치를 만들어주면 다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서서 있는 게 더 편할 때도 있으니, 잠깐 한 5분 동안을 기다리는데 혼자 앉아있기 뭐하니까 서서 잠깐, 서서 있으면 약간 이렇게 몸이... 잠깐 이렇게 팔만 기댈 수만 있다면, 그래서 뭐 시에나 광장에 있는 무슨 약간 폴(pole) 같은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도시에서는 여러 불특정한 사람들이 쓰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두 쉽게 쉽 수 있는 것인지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최근에 열심히 보는 책 중의 하나가 그런 공공 공간을 어떻게 스터디 하는가, 어떻게 탐구하는가. ’How to Study Public Life‘ 뭐 이런 거예요. 그런 걸 보면 계속 지금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생활이 옛날하고 다르다는 거죠. 굉장히 복잡하고 아무데나 가서 읽고. 뭐 지금 옛날 신문 보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공공 공간에 있는 시설들이. 그런데 너무 옛날 것으로 하는 거죠 지금. 모양만 좀 다르게 만들려고 그러지, 본질적인 사용의 문제를 별로 생각 안하는 거예요. 공공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거는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편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공공적이지만 이런 시설이나 공간을 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소유 공간에서도 그런 배려가 있으면 훨씬 더 좋은 도시가 되겠죠. 그게 진짜 공과 사의 중간 영역으로서 진짜 공공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르쳐주는 선생이 있어요. 얀 겔이라는 덴마크 노인인데 이 양반이 요즘 책도 많이 써내고 전부 다 그런 내용입니다. 옛날의 도시계획이나 어떤 이론가지고 지금 도시의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커버하지 못한다, 새로운 시대가 됐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잘 관찰하고 거기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주자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 책보면 재밌어요. 심지어는 그 연구원들이 사람을 스토킹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이 거리에다 뭘 디자인하려고 그러면 한 할머니가 지나가면 할머니가 어디까지 가는지 스토킹을 하면서 그 사람의 그 행동을 전부 관찰하고 기록하고, 또 그런 게 많이 모여서 거기에 뭔가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하면서 해야지, 옛날처럼 근사하게 돌 깔아주면 뭐가 될 거다, 그런 건 환상이라는 거죠. 절대 그렇게 사용 안한다는.
 
   함 : 공공 영역 이야기를 하니 선생님이 하시는 성북동 길도 있어서 마지막으로 ‘길’에 대한 얘기도 여쭤보고 싶어요.
 
   조 :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얀 겔 책에서 빌려 온 얘기인데, 우리가 자기가 사는 집을 나서서 또는 일하는 공간을 나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니는 데가 전부다 공공 영역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공공 영역이 특별히 광장, 뭐 이런 게 아니고 집과 집 사이. 조그만 골목 전부 다 포함해서 공공 영역이다. 그걸 어떻게 합리적으로 편하게 만들어줄 건가가 지금의 도시에서 고민해야 될 문제라는 거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광장이 없잖아요 원래. 길이죠 길.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다 있었어요. 그런 길도. 지금 그런 개념이 없어져서 그런 거죠. 골목도 마찬가지이고요. 요새 성북동 골목을 좀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흔히들 골목길 정비한다고 그러면 포장은 잘해주고 담에 재료 페인트 잘 칠해주고 벽화 만들고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골목이라는 것은 거기에 사는, 그 골목에 연결되어 있는 집에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외부공간이죠. 집 바깥의 공간. 하루 종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연결되어있는.
   그런데 이걸 우리가 잘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주민’이라는 게 너무 추상적이지요. 그 주민의 아이들도 있고 노인네들도 있고 또 어떤 지역은 노인네가 별로 안 사는데도 있을 거고, 그런 것에 따라서 이 골목을 통해서 애들은 학교를 가야되고, 그럼 얘가 학교를 몇 년을 다녀요. 적어도 대학교는 따로 딴 데 가서 한다지만 12년을 다녀야 되는 거잖아요. 초등학교부터. 그 다음에 가정주부는 계속 시장을 갔다 와야 되고 교회도 갔다 와야 되고, 그게 전부다 골목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구성원 중에 다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이용하는 거예요 이 골목을. 그런데 그걸 한 가지로 보고 이 골목은 뭐 이렇게 기니까 뭐 해야 되고, 짧으니까... 이런 식으로 물리적으로 디자인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골목을 쓰는가를 관찰을 한 다음에 그 관찰한 결과를 가지고 무언가를 디자인해야 해요. 그래야만 그 사람들에게 애착이 생기고 그 사람들이 스스로 이건 우리 동네 골목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자꾸만 표면으로만 그림그려서 예쁘게 치장하고 흥미 있게 만들어주고 그러다가 이제 관광객이 ‘아, 이쁘다’ 그래서 사직 찍으러 막 오다가 완전히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일어나고 망하고, 이화동이 대표적인 거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 주민이 누군가. 동네마다 다르죠 주민이. 그러니까 주민이 누군가를 잘 분석을 해서 그 사람들의 행동, 활동, 이것에서부터 골목 정비를 해나가야 됩니다.
 
   함 :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 시민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개입할 방법이 있을까요. 자기 동네에, 자기 도시의 문제에.
 
   조 : 똑같은 거라고 전 봐요. 아이들은 학교가고 주부는 시장가고 늘 하는 걸,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이건 내가 사용하는 길이다. 이 길은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다. 생활에 의해서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점유했다가 또 뭐 자기 사적 영역이 아니니까 이렇게 되는데, 그 공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뭘 원해야 되나. 예를 들면 대문이라는 건 길의 면에서 최소한도로 이렇게 열어놓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죠. 그런데 조금 더 해서 대문을 약간 좀 들이밀어서 자기 개인적 영역이지만 길에서 약간 한 50센티라도 들이밀어서 약간 포켓트처럼 만들면 그 대문 앞에다가 화분도 갖다 놓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공적인 것 하고 자기 개인적인 영역 사이에 중간지대 하나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조금만 내가 이렇게 배려를 하면 그게 그냥 길이 조금 넓어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반짝이는 뭐가 생겨요. 화분도 갖다 놓을 수 있고. 뭐 쓰레기도 갖다 놓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그런데 그것도 난 생활이라고 보거든요. 서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뭔가 서로가 이렇게 접촉을 하면서 거기서부터 이렇게 실마리가 풀린다. 그러니까 너무 자기 것을 전부 지키려고 그러지 말고 조금씩은 이렇게 내놓고. 그래서 뭐 기술적으로는 그런 거예요. 대문 앞에 약간 좀 비를 덜 맞는 약간 뚜껑이라도 만든다든지 그러면 지나가다 갑자기 비 올 때 그 사람이 거기 서 있을 수 있죠. 옛날에는 처마가 있어서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주민회의라는 게 그런 걸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함께 행복해질까를 논의하고 그걸 전문가들하고 상담하고 이러면 되는데 자꾸만 주민 참여라는 걸, 가서 아우성치고 뭘 해 달라, 이런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다운 생활이 거기에서 안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웰빙의 문제죠. 좋은 삶, 좋은 존재가 되는 것. 그렇게 인간답게 살아야 되는데 인간답게 사는 것 보다는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거죠 그동안에 우리가.



   함 : 집과 공공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짧은 시간 중에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되고 구체적인 생활에 근거해서 삶을 디자인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어떻게 여러 방식으로 사고하고 해답을 구할 것인가 하는 지점에 대해서도 큰 영감과 감동을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삶, 좋은 존재, 착한 삶, 착한 존재가 되는 것이 결국 건축의 질문이고, 인문적 질문의 핵심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스승 조성룡선생님께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프린트